십이원자(十二原者)에 대하여(11)- 피카소의 드로잉(drawing)과 침구동인(鍼灸銅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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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원자(十二原者)에 대하여(11)- 피카소의 드로잉(drawing)과 침구동인(鍼灸銅人)
  • 승인 2020.05.29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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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모

김선모

mjmedi@mjmedi.com


1. 피카소의 강아지 드로잉(drawing).

 

〈입체주의〉의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동물 드로잉(drawing)은 간결한 선(線)을 통해 동물의 특징들을 끄집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언뜻 봐서는 어린아이의 그림과 비교해 우열을 가리기 힘들 것 같은 이 강아지의 간단한 실루엣은 ‘피카소의 강아지’이기 때문에 천재적 통찰력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축약적(縮約的) 표현의 거장인 그가 일상생활에서조차 사물본질의 함축적 표현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회자되는 이야기는 젊은 시절의 피카소가 사실화(寫實畵)에 매우 탁월한 화가였다는 사실이다.

 

2. 경락(經絡) 경혈(經穴) 유주(流注)의 서술(敍述)

우리는 지금부터 《황제내경》에서 말하고 있는 경락(經絡)의 구체적-수송시스템에 대해 알아볼 계획이다.

그러기에 앞서, 여러분께 학부과정을 통해 긴 시간 학습하고 하루도 빠짐 없이 임상에 응용하고 있는 경락과 경혈-시스템의 구체적인 유주(流注)를 서술해 볼 것을 제안해 본다.

사암침법(舍岩鍼法), 오행침법(五行鍼法) 등의 자경(子經,) 모경(母經), 상생(相生), 상극(相克)의 복잡한 개념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는 원장님들께 기본적인 경락유주를 서술하라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요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꽤 많은 분들이 1.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2.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3.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 4.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 정도의 순서를 떠올리며 ‘오 이게 생각나네’라며 뿌듯해 하실 정도의 낯선 개념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너무 부담갖지 마시고 자세한 유주가 생각나지 않는 원장님들께서는 침구학 교과서를 보면서 서술하여도 무방하다.

그까짓 침구동인(鍼灸銅人)의 경락노선을 따라 설명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렵겠는가라며 자신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침구학 교과서를 자세히 보지 않으셨을 가능성이 다분해 보인다. 침구학 교과서의 곳곳에 있는 물음표들은 유주(流注)의 선(線)을 동강 동강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황제내경》이 말하고 있는 경락의 유주와 수송체계는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은 침구동인처럼 술술 서술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침구동인의 아름다운 선들은 경락의 실체를 가리는데 일조했을지도 모른다.

 

3. 실체적(實體的) 경락(經絡)

경맥십이자, 외합어십이경수, 이내속어오장륙부. 부십이경수자, 기유대소․심천․광협․원근각부동(經脉十二者, 外合於十二經水, 而內屬於五臟六腑. 夫十二經水者, 其有大小․深淺․廣狹․遠近各不同): 우리 몸의 오장육부는 12경수를 통해 연결되어 있으며 그 경락의 대소, 심천 광협, 원근은 각각 다르다.

범차오장육부십이경수자, 외유원천이내유소품(凡此五臟六腑十二經水者, 外有源泉而內有所禀): 장부 경락은 외부의 원천으로부터 에너지의 공급을 받는다. 《경수(經水). 영12》

인체(人體)의 에너지 공급시스템은 대소(大小), 심천(深淺), 광협(廣狹), 원근(遠近)이 각각 다른 경락(經絡)들이 장부(臟腑)로의 에너지공급-경로를 연결하고 있으며 그 장부(臟腑) 경락(經絡)은 외부(外部)의 원천(源泉), 즉 구형(軀形)의 원혈(原穴)로부터 365절(節)의 기미(氣味)를 공급받고 있다는 말이다.

천지지정기(天地之精氣)의 에너지 공급이 알맹이 오장(五臟)까지 도달하는 경로의 시스템은 막연한 ‘상상(想像)의 공급경로’가 아닌 대소(大小), 심천(深淺), 광협(廣狹), 원근(遠近)의 ‘실체적(實體的) 공급선(供給線)’인 것이다.

 

4. 유주노선(流注路線)만 남은 경락(經絡)

《황제내경》의 경락의 유주가 관념적(觀念的)이지 않고 실체적(實體的)이란 것은 그 유주노선의 발생이 사념적(思念的)이지 않고 경험적이고 관찰적인 결과라는 말이다. 그 경락이란 실체를 뒷바침할 관찰 정보들은 매우 방대하고 복잡하다. 이 복잡난해(複雜難解)한 사실들에서 뽑아낸 규칙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축약도(縮約圖)이다.

지하철 노선도(路線圖)는 이해하기 복잡한 여러 노선(路線)들을 형태의 단순화와 색깔의 구분을 통해 시각적(視覺的) 인지도(認知度)를 높여 이해하기 쉽도록 표현한 축약도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침구동인의 간결한 경락의 유주도도 시각적 인지도를 높임으로서 복잡한 경락의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그린 축약도이다.

당연히 실제 지하철의 노선의 운행은 경유지점들의 단순화된 연결인 지하철 노선도(路線圖)보다 훨씬 복잡할 것이다. 더군다나 살아있는 생명력(生命力)의 운행시스템인 경락(經絡)-순환시스템이 지하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 생각하는 경락의 순환시스템은 익숙했던 침구동인의 유주노선 정도에서 그쳤을지 모르겠다. 침구학 교과서는 역대제가들의 피땀어린 해석들을 통해 《황제내경》-경락시스템의 기전(機轉)과 용어(用語)를 설명하고 우리는 그 교과서를 열심히 학습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경락(經絡)-순환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서술할 수 없는 이유는 그 개념들이 실체적(實體的) 경락(經絡)을 설명할만큼 충분히 해석되고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오랜 오해와 좌절들로 인해 유주노선을 제외한 경락의 거의 모든 것이 부정(否定)된 듯하다. 복잡한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그려졌던 축약도는 오히려 경락 그 자체가 되었다.

경락은 오랜 인류의 과학적 호기심이 인체 생명력에 대한 집요한 관찰을 통해 이룩한 경이로운 결과물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 정교한 법칙들의 진의(眞義)는 어두워져 이제는 연문(衍文)과 착간(錯簡)의 딱지가 더덕더덕 붙여진 낡은 꼰대의 학문으로 전락(轉落)하고 말았다.

덕분에 지금의 한의사는 《황제내경》이 이해되지 않아도 올바른 해석에 대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으며 경락의 운행을 알지 못하더라도 보이지도 않는 경락에 뭐하러 집착하냐는 ‘쿨(cool)함’이면 ‘샤프한 과학적 한의사’노릇도 가능하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경락,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랴, 내가 쓰는 특효혈에 현대의학검증의 윤허(允許)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는 한의사가 더 의사다울진데...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5. 복잡난해(複雜難解)한 추상화(抽象畵)의 이해실패

〈입체주의〉는 사물의 존재에 대한 다각적(多角的)이고 본질적(本質的)인 탐구의 결과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극단의 함축적 표현이 시(詩)인 것처럼 〈입체주의〉는 회화(繪畫)에 있어서 시(詩)와 같다.

대상의 겉모습부터 인지하기 시작한 어린이의 원시적 표현과 달리 대상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한 후 통찰력과 창작력으로 응축시킨 추상작품(抽象作品)은 고도(高度)의 지적산물(知的産物)로 평가 받는다. 즉, 사람들은 피카소의 수만번의 붓질을 거쳐 창조된 사물 본질의 재탄생에 감탄하는 것이다.

침구동인의 유주노선은 경락과 경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 설명서(說明書)이다. 복잡다단한 경락을 실체화 시킨 유주노선은 시각적 인지도를 높여 복잡한 경락-운행시스템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훌륭한 기본 교보재이자 경락본질(經絡本質)의 한가지 표현인 것이다. 하지만 대가(大家)의 통찰력을 통한 함축된 선(線)들은 폄석(砭石)의 자극에 효과를 보였던 투박하고 원시적인 경험의 연결정도일 뿐이라 폄하받고 있다. 시대를 거스르다 못해 가장 초기의 경험만 남기고 모조리 부정(否定)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높은 수준의 이해에 실패한 《황제내경》은 그저 연문과 착간으로 구성된 허구(虛構)의 기록이 되었다.

피카소의 추상화(抽象畵)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들은 염두(念頭)에도 두지 않고 피카소는 어린이보다도 못한 저능아(低能兒)라 비웃는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예술적 지성(知性)을 이해못하는 사람에게 ‘피카소의 강아지’는 어린이의 낙서보다도 못한 ‘눈도 없는 강아지’에 지나지 않는다.

 

6. 실체적(實體的) 경락(經絡)의 올바른 이해(理解).

지금껏 공부해온 경락과 앞으로 공부할 경락은 실체적 경락의 관찰기록이라 힘을 다해 주장하는 대가(大家)의 기록을 이리도 쉽게 부정(否定)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인의 과정이다.

체험의 공유를 통해 타인(他人)을 이해(理解)시키기 매우 어려운 경락의 실체를 감히 증험(證驗)하려는 것이 아니다. 수천년의 집요한 관찰이 누적된 기록을 우리가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한 재확인의 제안(提案)이다.

미술에 문외한(門外漢)인 내가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자마자 인간의 잔인함이 초래한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생소함 이면(裏面)에 있는 작가의 진의(眞意)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이유는 사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그의 집념(執念)을 알기 때문이다.

 

김선모 / 반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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