保元契의 五人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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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元契의 五人 (1)
  • 승인 2020.05.1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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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15

지난 1233호에 [정보의 판단]을 실었다. 이것은 洪淳用 선생과 保元契의 관계를 다룬 글이다. 사실 ‘8체질의학 공부’라는 칼럼 기획과는 썩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우리가 공부하면서 접하는 많은 자료 중에서 ‘바른 情報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의미로 이 글을 썼다.

오늘 시작해서 두 번에 나누어 실을 글은 지난 글의 후속 글이다. 이것을 통해서 ‘洪淳用 선생과 保元契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결론’에 대한 좀 더 명확하고 자세한 증거를 제시하려고 한다. 이글의 기반이 된 자료를 제공한 분이 있다. 李璟城 박사의 勞苦와 勇氣에 깊은 尊敬을 보낸다.

2020년 5월 27일이면, 사상체질의학회가 대한사상의학회로 하여 출범한지 50주년이 된다. 한때 이 학회에 몇 년간 몸을 담았던 처지로 이글을 쓰게 되어 기쁘다.

『詳校懸吐 東醫壽世保元』

 昭和十六年二月 曰七版 保元契發行 編輯 韓斗正 校閱 韓敏善

 

 

띠동갑

李濟馬, 洪淳用, 權度杬, 廉泰煥 네 분에게 공통점이 있다. 사상의학과 체질의학 분야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네 분 모두 띠동갑이다. 東武 公은 1837년 丁酉生이고, 懷山 선생은 1909년 己酉生이며, 東湖 선생은 1921년 辛酉生이고, 廉 선생은 1933년 癸酉生이다.

그리고 내게 중요한 또 한 분의 닭띠 어른이 있다. 평소의 소원대로 맏손자가 대학에 들어간 것을 보신 당 해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다. 1909년생으로 홍순용 선생과 동갑이다. 홍순용 선생의 자료를 보다가, 1935년쯤에 강원도 通川 벽촌에 갔다가 장티푸스를 앓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할머니도 내 머리를 당신의 무릎에 베게 하고는 그 말씀을 하시곤 했다. “日政 때 장질부사를 앓아서 머리가 다 빠졌었다”고. 그 난리에 아이 둘을 잃었지만 당신은 살아남았다고.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참빗으로 머리를 다듬고 비녀를 꽂으셨다. 그리고 곰방대로 잎담배를 피셨다. 할머니는 사기 결혼을 당했던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형과 누이를 잃고 혼자 남은 막내아들을 키우셨다. 그래서 李氏는 내 친할아버지의 姓이 아니다. 이런 건 자랑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걸 밝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숨기지 않고 글로 쓸 자신이 있다. 그것은 부끄럽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팩트(fact)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때는 힘이 있다. 당연히, 거짓을 말하고 쓰는 사람에게는 힘이 없다. 언젠가 그 거짓이 드러나는 날 그것은 너무나도 가볍게 사라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삶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것이 체질이다. 자랑스러운 것도 역사고 감춰두고 싶은 것도 역사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것보다는 그 감춰두고 싶은 역사로부터 反省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進步요 發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보다 인생이 앞선 선배는 존중해야 마땅하다. 그들의 삶에 대한 노력과 경험이 분명 내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향을 돌려서 뒤를 본다면 우리는 또 다른 다짐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뒤에 따라 오는 인생의 후배들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남겨야만 하는 것이다. 선배들은 이미 떠났고 삶의 현장에서 은퇴했다. 오늘 어렵게 거짓을 발견한 내가 그것을 말하지 않고 덮어둔다면, 후배가 그것을 다시 찾아낼 때는 훨씬 힘든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함께 증언해줄 世代는 사라지고 증거의 흔적은 더 희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李璟城의 노력

2010년에 사상체질의학회에서 『사상체질의학회 40년사』 편찬 작업을 할 때, 추모사업이사였던, 홍익한의원의 이경성 원장은 집필 자료를 준비하기 위하여, 李鎭胤 朴奭彦 洪淳用 세 분 선생의 자제분들을 인터뷰하였다.

李鎭胤 선생의 아드님인 李聖洙 씨를 경기도 광주시 삼동 우남아파트 자택에서, 2010년 6월 19일 오후 4시 30분부터 5시 55분까지 인터뷰하였다. 洪淳用 선생의 장남으로 전쟁기념관 관장을 지냈던 예비역 장군인 홍은표 씨는,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에 있는 홀리데이인성북의 가빈에서, 2010년 8월 2일 오후 7시부터 9시 40분까지 인터뷰하였다. 朴奭彦 선생의 장남 박영성 씨는, 서울시 강북구 송천동에 위치한 홍익한의원의 서재에서 2010년 7월 14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인터뷰하였다.

그리고 인터뷰한 결과를 녹취록으로 정리하였다. 2020년 4월 13일에, 나는 이경성 원장에게 『동의수세보원』의 판본 중 6판본과 관련하여 전화를 통해서 처음 물었고, 이어서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保元契’와 관련한 내용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는 나와 이 사안을 대하는 태도가 비슷했다. 그리고 나는 보원계와 관련한 글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화를 하던 도중에 이경성 원장이 녹취록 파일을 보내주었다. 나는 이 녹취록을 읽지 않은 채로 내가 준비해 두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2020년 4월 15일에 ‘정보의 판단’이란 제목으로 ‘홍순용 선생과 보원계’의 관계에 관한 첫 글을 완성했다.

글을 쓴 후에 녹취록을 읽어보니 이경성 원장의 사전준비가 충실해서 개별 인터뷰에서 중요한 정보들이 도출되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녹취록으로부터 내가 추출한 것을 기반으로 해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洪淳用 선생

홍순용 선생은 평생 세 가지를 품고 사셨다. 하나는 복음교회이고, 둘은 四象醫學이며, 셋은 바로 山이다.

洪淳用 선생은 1909년 6월 28일(陰)에, 충청북도 中原(장호원)에서 홍종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洪淳甲이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웠는데 아주 총명해서 천재소리를 들었다. 소학교에 다닐 때는 그림도 잘 그려서 동아일보가 주최한 대회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스무살에 결혼했다. 청년기에 사회주의에 빠져 日警의 감시와 추적을 받았다. 그래서 당시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들던 금강산으로 피신해서 은거했다.

1935년에 기독교조선복음교회를 창립하게 되는 崔泰瑢 목사가, 1930년에 금강산 지역에서 집회를 할 때 그의 思想을 접하고 빠져들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함경도 지역에서 선교활동과 교회개척을 하게 된다. 1936년 1월 12일에 열린 기독교조선복음교회 제1회 총회에서 장로가 된다. 홍순용 선생의 나이 28세 때다.

1930년에 장안 사동리교회, 1937년에는 강원도 고성군 북연 장전리의 장전교회 책임자로 있었다. 1939년에 잠시 서울(京城)에 돌아왔다가, 1940년에 함경북도 明川으로 온 가족이 이주를 했다. 여기에는 명천교회가 있다. 1943년까지 명천과 영안에 있었는데, 이 사이에 四象醫學을 접한다. 1932년에 강원도 풍천군 부기면 대려리, 금강산 속에 있던 교회에서 출생한 장남 홍은표 씨는 자신의 부친이 1941년에는 분명히 명천에 있었다고 하였다.

1943년에 서울 가회동으로 복귀하였는데, 귀경 6개월 후에 종로경찰서에 40일간 유치를 당한다. 복음교회의 교인들이 애써서 나오게 되었고, 나온 후에는 한글과 국사 공부에 집중했다고 한다. 1945년에는 서빙고초등학교에 있었고, 동아일보 지사장을 하기도 했다.

함경도 명천과 영안에 있는 복음교회는 한양대학교 설립자인 김연준 선생의 형님들이 만든 교회였다. 그런 인연으로 홍순용 선생은 1948년부터 1950년에 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까지 한양공고에서 교감으로 재직하며 국어를 가르쳤다.

6.25가 나기 전에 이진윤 선생이 열고 있던 보원국에 홍순용 선생이 가서 배우면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는 말은 양쪽의 기억이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다. 하여간 전쟁이 터지고 바로 헤어졌으니까 그 정도의 기간은 큰 의미는 없다고 판단한다.

전쟁이 나고 홍순용 선생은 6월 28일에는 충청도에 있었다. 그러다가 경기도 이천으로 가서 피난하면서, 사상의학으로 환자도 돌보면서 율면에 천국교회를 창립하였다. 1953년에 상경하여 원남동에 있던 보원국에서 다시 근무하기 시작했다. 종로에서 덕일한약방을 하던 중에 1958년 6월 5일에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하여 한의사면허(면허번호 817)를 받았고, 德一한의원으로 바꿔서 개설하였다.

1964년에 『대한한의학회보』 11호와 12호에 연속으로 「동무 이제마전」을 기고하였다. 여기에서 ‘保元契’와 선생의 관계를 언급하였다. 1964년 7월 20일에 대한한의학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사상의학에서 본 고혈압」을 발표하였다. 1965년 4월 20일에는 제3대 대한한의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대한한의학회 주최로 본격적인 사상의학 강좌를 열었다. 10월 30일에 사상의학 강좌를, 11월에는 1개월 과정의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66년에, 한의사협회장을 지낸 김정제 선생이 회장으로 있던 대한기독한의사회의 부회장이 되었다. 1970년 4월 24일(陰 3.19)에 사상의학연구회를 발족시킨 후에, 5월 27일에 대한사상의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당 해에 신당동으로 한의원을 이전하여 홍순용한의원을 열었다. 이후에 대한사상의학회의 정기적인 모임을 홍순용한의원에서 가졌다.

1985년에 일흔일곱이던 홍순용 선생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갔다고 한다. 1992년 4월 14일에 경희의료원에서 별세하였다. 장례는 복음교회 교회장으로 치렀다.

 

이강재 / 임상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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