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913> - 『尾陽唱和錄』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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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913> - 『尾陽唱和錄』③
  • 승인 2020.04.25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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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mjmedi@mjmedi.com


국제무대에서 활약한 良醫 奇斗文

신미사행길에 조-일간에 펼쳐진 필담창화를 기록한『尾陽唱和錄』에서 대미라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의관 기두문의 눈부신 활약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말한 것처럼 일본에서 기두문은 최고의 명의로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환자를 진찰하고 의학 문답에 응해야 했기에,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시달려야만 했다.

◇ 『미양창화록』

때문에 이 책에 실려 있는 시문은 주로 그가 일본 측에 건네 준 것보다는 그에게 바쳐진 찬시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저자 大田東作이 기두문에게 올린 시고가 여러 편인데, 그 중 일부를 옮겨본다. “화타의 교묘한 생각에 귀신이 먼저 놀라니/ 뉘라서 신술을 꾀하여 지극히 미묘한 데(至微) 접어들 수 있겠는가/ 나라밖까지 명성이 전해져 사절을 수행하니/ 醫囊에서 비방을 찾아 天機를 희롱하네/ 이동원과 장원소의 내상외감병을 상세히 가려내었고/ 주단계와 설립재의 음양론에 어긋남이 있으랴 …”(呈醫官奇先生)

기두문이 이에 화답한 헌시도 한편 실려 있는데, 평소 의업에 임하는 그에 자세와 술법을 엿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 “… 편작과 창공의 치료법을 알려거든/ 모름지기 손빈과 오기의 용병술 같아야 하니/ 마땅히 음양과 수화를 세심하게 살펴야/ 생사와 안위가 어긋나지 않음을 징험하게 될 것이다 …”(奉酬大田醫師)

위의 시구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별도의 주기가 붙어 있다. ‘通書論陰陽有餘, 略于此.’ 아마도 서신을 통해 음양을 논한 것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는 말인 듯하다. 그들이 직접 만나서 필담을 나누는 일 외에도 여가를 틈타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해 의학토론을 이어간 것으로 보이는데, 전문이 실려 있지 않아 아쉽다.

앞선 시의 말미에 기두문이 의원 大田東作에게 “… 그대가 한결같이 사람들을 구제함에 뜻을 둔걸 알겠으니/ 시린 골짜기에 봄볕이 두루 미치게 할 수 있을 것이네.”라고 읊었다. 大田은 이에 감격하여 또 다시 헌시 한편을 답시로 올리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의술과 문장에 모두 공력이 있으니/ 작은 말 한마디로 아픈 머릴 낫게 해줄 수 있음을 이에 알게 되었네 …”

한편 당시 조-일 외교에서 대마도번 소속으로 통신사행이 오가는 길목마다 응대와 접빈객, 그리고 조선어 통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했던 아메노모리 호슈(雨森方洲, 1668~1755, 조선명 雨森東)와 주고받은 시문도 같이 실려 있다. 이것은 당시 이러한 필담류에 당대 명사들의 글을 함께 실음으로써 세속적인 인기에 영합해 독자로부터 관심을 끌게 하려는 속셈으로 풀이된다.

일인들끼리 주고받은 문답과 시문이 권미에 다수 실려 있는데, 이 또한 당시 수행사절을 응접하여 수행했던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 책의 가치를 드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의원 大田東作과 雨森方洲 외에도 葛卷恕溪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나고야 지역 명망 인사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여기서 조선의관으로 기두문과 함께 이름이 거명된 玄萬奎, 李渭 등에 관해서는 등장하는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별도로 조사해 보니 현만규(1653~1730)는 본관이 川寧으로 1678년 증광시 의과에 입격한 이후 의금부의 월령의원으로부터 시작해서 혜민서, 전의감을 거쳐 내의원정(정3품관)에 이른 인물이다. 그에 관한 기록이 같은 시기에 기록된『東槎日記』에도 나타난다.

이위는 생몰년이나 인적사항이 밝혀져 있지 않으며, 역시『東槎日記』와 이때의 사행기록에만 등장하는데, 병조 예하 五衛의 從九品官인 副司勇이란 직함으로 기재되어 있다. 의학문답은 관찬사서에 드러나지 않는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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