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度淵은 儒醫인가? 業醫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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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度淵은 儒醫인가? 業醫인가?
  • 승인 2020.04.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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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한기춘, 서정철, 최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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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황도연(56)

Ⅰ. 서론

지금까지 필자는 儒醫라는 용어에 대해 儒學者와 醫人의 합성어로 “유학자 가운데 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김성수1)는 대표적인 儒醫로 정약용을 들고 있는데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데 惠庵 黃度淵의 경우 일각에서는 儒醫라 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은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채 서로 베끼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과연 黃度淵을 儒醫라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黃度淵이 儒醫라는 주장

그렇다면 黃度淵이 儒醫라는 주장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그 시작은 2001년 이선아2)의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는 “黃度淵에 이어 그의 아들 황필수도 역시 ”儒醫“로서 알려져 있었으며 또 漢學에도 달통하였고, ···… 여기서 특히 그를 ”儒醫“라고 소개한 것은 그의 집안이 당시의 이른바 ”中人“ 출신이 아니었다는 뜻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참조한 소개의 글은 <對譯證脈·方藥合編> 중 黃度淵 小傳3)에 “方藥合編이라 呼稱하라고 그의 아들인 泌秀 儒醫에게 命하고”라는 부분을 이선아가 확대 해석하여 “黃度淵에 이어 그의 아들 황필수도 역시 “儒醫”로서 알려져 있었으며···…”라고 하였다.

김남일4)은 “황도연(黃度淵), 황필수(黃泌秀) 부자에 의해 1884년 만들어진 ‘방약합편(方藥合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의(儒醫)의 전통을 잇는 의서(醫書)이다. ···… 의방활투醫方活套를 간행하는 등 조선 후기 유의 가운데 가장 활발한 저술활동을 벌였다.”고 하였으며, 또한 “개항기 한국의 한의학을 빛낸 삼대三大 의가醫家를 꼽는다면 황도연黃度淵···…공통적으로 유의儒醫인 이들은···…”이라고 하여 黃度淵을 儒醫라고 주장하였다.

오재근5)은 이선아2)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황도연(黃度淵, 1808-1874)의 생애와 관련된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중인 계급이나 의과 출신 전문 의료인이 아닌 한학에 무척 밝았던 유의(儒醫)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였다. 또한 “···…문장 중에서 한 글자씩 취해 ‘무집(無集)’, ‘항집(恒集)’, ‘인집(人集)’ 등으로 부르고 있는 것은 황도연이 지닌 유의로서의 일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였다.

이진철6)도 “···…致心依道只是俱生(마음을 다하고 도에 의지하여야 모두가 생명을 누릴 수 있다)의 문장이 만들어 진다. 이러한 문장을 통해서 황도연이 지닌 유의로써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고 하여 黃度淵이 儒醫라고 주장하였다.

 

2. 黃度淵이 儒醫가 아니라는 근거

三木榮7)은 儒醫에 대해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朝鮮で儒医と称るは,日本の儒医が儒者にして職業医師であるのとは, 根本から違つたものである.半島での儒医は, 文官学者で医学を余技としそれに秀でた者に過ぎないのである(조선에서 儒醫라 칭하는 것은 일본에서 儒醫가 儒學者이면서 직업의사인 것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조선의 儒醫는 유학자로 의학을 특기로 하는 사람으로 단지 의술이 뛰어난 자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黃度淵에 대해서는 “惠庵は,京城武橋で医業を開き名声の高かつた人で···…(惠庵은 京城武橋에서 醫業을 펼쳤는데, 名聲이 높았던 사람으로···…)”라고 하여 직업의사로는 보았지만 유학자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黃度淵을 儒醫라 부르지는 않았다.

<承政院日記> 현종 13(1672년) 윤7월 4일에는 “以內醫院言啓曰, 本院議藥同參醫官, 見存者無多, 無於議藥之際, 未免孤陋之患, 業醫著名之人, 不可不招集廣詢。京居人趙錫孚, 南陽人方泰重, 術業頗精, 士夫間亦多見效者, 竝爲付軍職, 使之同參議藥, 何如? 傳曰, 允.”이라고 나오는데, 내의원에 醫官이 부족하므로 業醫 중에 著名人인 趙錫孚 등을 軍職에 붙여 議藥에 동참시킬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그림 1. 承政院日記의 議藥同參 黃道淳
 그림 1. 承政院日記의 議藥同參 黃道淳

 

<承政院日記> 헌종 13(1847년) 3월 24일에는 “李根友以內醫院都提調·提調意啓曰, 議藥同參李鎭夏有頉代, 醫人黃道淳差下, 令該曹口傳付軍職, 冠帶常仕, 何如? 傳曰, 允.”이라고 나오는데(그림 1), 黃道淳(黃度淵의 改名 전 성명)이 醫人에서 議藥同參으로 처음 관직에 들어오는 내용이다. <承政院日記>를 살펴보면 당시 惠庵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 都提調 朴晦壽와 提調 金東健의 추천을 받아 왕이 윤허하여 議藥同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黃度淵은 <醫宗損益>의 跋文에 “余畢生迂拙, 不適於用, 所業者, 惟九流之一技耳(나는 평생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옹졸하여 등용되기에 마땅하지 않아서 직업으로 삼은 것이 오직 구류의 한 줄기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 民間에서 醫業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議藥同參이었던 李鎭夏가 喪으로 탈이 나서 黃道淳으로 대체한 것은 단지 黃道淳에게 “業醫著名之人”이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았을 뿐, 黃度淵은 儒醫가 아니라 業醫임을 알 수 있다.

 

 

Ⅲ. 고찰

1. 儒醫에 대한 定義

성호준8)은 儒醫의 개념에 관해서는 현대에서도 정설이 없다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역사적으로 ‘儒醫’가 처음으로 출현한 것은 北宋시기이며, 南宋시기에 와서 儒醫란 醫學에 정통한 이들이거나 대대로 유학을 배우고 의학에 종사한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의 林股가 주장한 儒醫 개념을 소개하였는데 “첫째는 의학을 유행의 하나로 보아 자신의 보건에 이용한 이, 둘째는 의학 이론의 연구를 중심으로 책을 쓰고 이론을 세우거나 의학서적의 편집에 힘쓴 이, 셋째는 관직에 있으면서 의업을 행한 이, 넷째는 진정으로 의사를 직업으로 삼은 경우”라고 하였다.9)

김남일80)은 “조선시대의 의학 종사자들은 일반적으로 유의, 업의, 약종상의 세 부류로 나뉜다. ···… ‘유의’는 유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된 경우이고, ‘업의’는 대대로 의업을 가업으로 하는 중인층에 속하는 의사들을 말하며, ‘약종상’은 단순히 약물을 사고파는 약물판매업자들을 말한다.”고 하였다.

한편, 신동원 등11)은 조선 시대의 儒醫는 “유학자로서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을 지칭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을 근거로 하면 유학을 연구한 학자인지 개업하여 의술을 펼친 의사인지에 따라 儒醫라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다.

 

2. 儒醫와 業醫

黃度淵을 儒醫라 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필자는 우선 <朝鮮王朝實錄>과 <承政院日記>에서 儒醫와 業醫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였다. 먼저 <朝鮮王朝實錄>에서 儒醫에 대해 태조 4년에 儒醫敎授라는 직책이 등장하고, 세종 16년에는 “且古之良方, 多出儒醫之手, 則通理文人, 兼治醫術, 古有其例(옛적 좋은 약방문이 儒醫의 손에서 많이 나왔사온 즉, 이치에 통달한 文人이 겸하여 의술을 다스림은 옛날에도 그 예가 있사오니)”라는 내용을 통해 당시에 유학자로 하여금 의학을 하도록 장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종 18년에는 “況業醫之人, 必明知其理術矣(醫業을 일삼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 이치와 기술에 밝을 것이니)”라고 나오고, 문종 2년에는 “重禮業醫, 精於其術, 近世之醫, 罕有其比(노중례는 의원을 직업으로 삼아 醫術에 精通하여 近世의 의원으로서는 그에 비할 이가 드물었다.)”라고 하여 盧重禮를 業醫라 지칭하였다.

<承政院日記>에서 인조 17년에 “不然則當受於外方儒醫矣(그렇지 않다면 외방의 儒醫에게 수침하겠다)”라고 나오며, “近來內局醫官, 曉解醫術者, 甚少, 故外方業醫之人, 隨聞招見···…(근래 內局의 醫官 중에 醫術을 잘 이해하는 者가 매우 적으니, 外方의 業醫를 수소문하여 초치하고자···…)”라고 나온다.

黃度淵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議藥同參으로 활동한 李顯養(1783~1852)은 문집 <谷靑私藁>를 남겼는데, 그가 쓴 議藥廳誌序(1838년)에 “仁祖 때에 醫藥廳을 처음 설치해 業醫와 儒醫 네댓 명이 함께 投藥을 의논했으며···…”라고 나온다.12) 家業인 醫術을 열심히 익혀 나이 21세(1803년)에 醫科에 합격한 李顯養은 業醫인데 議藥廳誌序에서 業醫와 儒醫를 명확히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다.

儒醫와 業醫에 관련하여 <朝鮮王朝實錄>과 <承政院日記>의 자료를 조사한 결과 조선시대의 儒醫는 業醫와 상대적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儒醫에 대한 定義는 다양하여 定說이 없으나 조선시대에 한정하여 논한다면, 신동원 등의 “유학자로서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으로 定義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사려된다. 필자는 이번 연구를 통해서 조선 시대의 儒醫에 대해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지만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학자”로 定義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黃度淵은 儒醫인가? 業醫인가? 黃度淵은 <醫宗損益>의 跋文에 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해 “我本早孤 人生無强 近親家計又不贍(나는 본래 일찍이 의지할 곳 없는 고아가 되었고, 살면서 아주 가까운 친척도 없었네)”라고 회고하였으며, 아울러 “十五廢擧業, 十六學黃神(15세에 과거공부를 접고, 16세에 의학을 공부하였다)”라고 하였다.한편, <醫宗損益附餘> 서문에 “吾家世業擧不中(우리 집안은 대대로 科擧 공부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여)”라고 하여 生員進士科인지 雜科 중 醫科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집안 대대로 과거는 응시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실제 惠庵의 科擧 합격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고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黃度淵은 科擧는 공부하였으나 儒學者라고는 할 수 없으므로 儒醫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요컨대 黃度淵은 儒醫가 아니라 業醫이며 黃度淵이 儒醫라는 주장은 여러모로 보아 타당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 글에서 黃度淵이 儒醫라는 오류의 근거를 밝힌바 기존에 잘못 알려진 정보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Ⅳ. 결론

본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1. 黃度淵이 儒醫라는 주장은 이선아의 연구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儒醫에 대한 定義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재고의 필요가 있다.

2. 儒醫는 “의술을 업으로 하지 않지만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유학자”로 定義하여, 직업으로 의술을 펼치는 業醫와는 구별하여 사용하여야 할 것이다.

3. 黃度淵은 業醫 중 著名人을 발탁하는 議藥同參 제도로 관직에 나아간 것이므로 儒醫라 하는 것보다 業醫라 해야 타당할 것이다.

 

<참고문헌>

1. 김성수, 조선시대 儒醫의 형성과 변화, 한국의사학회지, 2015:28(2):105-120.

2. 이선아, 이시형, 황도연의 方藥合編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의학지, 2001:11(1):101-109.

3. 남산당편집국, 對譯證脈方藥合編, 남산당, 1977:5-1.

4. 김남일, 근현대 한의학 인물실록, 들녘, 2011:285.

5. 오재근, 김용진. 조선후기 본초강목의 전래와 그 활용: 본초정화, 본초부방편람을 중심으로, 의사학, 2011;20(1):29-51.

6. 이진철, 의종손익을 통해 살펴본 황도연의 의학사상 연구, 2017,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7.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自家出版(再版), 1963:257, 348.

8. 성호준, 儒醫의 개념정립과 張介賓,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2007:20(1):125-136.

9. 성호준, 儒醫 의학의 사상적 배경에 관한 이해,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 2003:16(1):6-19.

10. 김남일.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들녘, 2011:10, 237.

11. 신동원·오재근·이기복·전종욱, 歷試漫筆, 들녘, 2015:616.

12. 허경진, 곡청사고(谷靑私藁)를 통해 본 의원 이현양의 글쓰기, 醫史學, 2008:17(2):177-189.

 

한기춘·서정철·최순화 / 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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