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911> - 『尾陽唱和錄』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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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911> - 『尾陽唱和錄』①
  • 승인 2020.04.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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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mjmedi@mjmedi.com


나고야에 아로새긴 朝日問答

지난 연말부터 이어진 감염병이 아직 끝을 보이지 않고 있어 답답한 마음 그지없다. 그 바람에 상반기에 계획되어 있던 각종 국제행사와 방문 일정이 줄줄이 취소되거나 기약 없이 연기되는 마당이다. 마냥 손 놓고 지낼 수만 없어 이런 저런 자료를 뒤적이다 오래 전에 구해두고 방치했던 의학문답류를 살펴보기로 했다.

◇ 『미양창화록』
◇ 『미양창화록』

『尾陽唱和錄』은 나고야 지역에서 활동하던 宜春堂 大田東作이란 의원이 辛卯使行(1711년) 길에 나선 조선의 三使와 良醫로 참가한 奇斗文 등과 나눈 문답 및 창수한 기록을 적은 책이다. 이 문답은 오래 전에 논문으로 발표하고 이 자리를 통해 소개한 바 있는 『桑韓醫談』과 같은 해에 이루어진 통신사행의 일을 기록한 것이어서 두 기록을 서로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으로 보인다.(246회 辛卯使行과 醫學問答 - 『桑韓醫談』① / 2005년5월23일자, 247회 良醫 奇斗文의 行跡은 어디에② / 동5월30일자)

마침 조선통신사 필담창화집 번역총서 가운데 하나로 발행된 기태완, 김형태 역주본이 있어 참고할 수 있었다. 역서에는 해제와 탈초한 정문을 비롯해 원문이미지까지 곁들여 놓아 손쉽게 대조해 볼 수 있다. 다만 부록으로 수록된 원문의 장차가 뒤섞인 곳이 있고 더러 역문의 교열에 미진한 곳이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이 책은 필사본 1책으로 표지 포함 50면, 5600자 가량이어서 분량으로만 따져보아서는 그다지 많지 않은 편이다. 겉표지 제첨에 ‘미양창화록’이라고 쓴 서제는 나중에 만들어 붙인 것으로 보이는 표지에만 들어있어 아마도 후인이 덧붙인 것이 아닌가 싶다.

본문 첫머리는 ‘正德元年辛卯朝鮮來聘’이란 글귀로 시작하는데, 三使와 製述官을 비롯하여 서기와 通事(譯官), 의관을 비롯하여 押物判事, 寫字官, 畵師, 軍官, 書記, 馬上才, 樂人 등 수행인원의 명단이 일일이 열거되어 있다. 특히 馬醫로 동행한 安英敏이란 이름도 보여 호화 진용으로 갖춰진 사절단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 이채로운 것은 조선국왕(李焞, 숙종 임금)이 보내는 國書와 일본국왕(源家宣)이 답신한 글이 앞뒤로 함께 실려 있어 일개 지방 의관이 기록한 이 책에 양국간 외교문서의 문안이 어떻게 실릴 수 있었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아마도 나고야가 에도를 왕복하는 사행길의 길목에 놓여 있어 오고가는 길에 모두 접견할 수 있었기에 훗날 탐문하여 채록해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헤제에 의하면, 신묘년(1711)에 이루어진 8차 사행에서는 이제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9종의 필담창화집이 나왔으며, 이것은 이전에 비해 곱절 이상 많은 숫자라고 한다. 또 조선에 돌아온 부사 임수간이 이 때의 견문을 기록한 『東槎錄』을 남겼고 역관 김현문도 동명의 『동사록』을 지었기에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더 놀라운 일은 필담창화에 참여한 일본인 명사와 의원이 250여 인에 달한다 하니 당시로선 더할 나위 없이 학술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진 것이며, 가히 문화열풍을 불러온 셈이다. 또한 조선의관과 일본인 의학자간에 이루어진 심도 깊은 학술토의, 곧 약초변위 논쟁이나 의학서와 변증치료에 관한 치밀하고 열띤 토론으로 밤을 지새우느라 격무와 누적된 피로를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 본문 안에서 여러 차례 눈에 띄어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이다.

때론 고된 사행길에 병자가 생겼을 때, 서로 상대에게 診病과 의약을 구하기도 하여 우의를 돈독히 하는 훈훈한 미담을 만들기도 하였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단시간에 번진 감염병 유행으로 방역물품 수급 대란이 빚어지고 서로 상대국을 탓하고 배척하는 현실을 직면하면서 재삼 交隣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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