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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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907> -
  • 승인 2020.03.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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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mjmedi@mjmedi.com


닥쳐올 患難에 대비해야할 備急方

이 책의 이름 『비방초기』는 설핏 듣기에 따라서는 누군가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채, 감추어두고 혼자만 몰래 사용해 온 祕方을 적은 것으로 오해하기 쉬울 듯하다. 하지만 서명의 한자는 ‘備方抄記’로 평소 질병의 유행에 대비해 꼭 필요한 특유방을 가려 뽑아 적어 두었다는 의미로 새겨야 옳을 듯 같다.

◇ 『비방초기』
◇ 『비방초기』

책의 외형은 가로세로 약 13cm 가량으로 예전 같으면 도포자락이나 소매 속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자그마한 크기의 소책자이니, 분류상 袖珍本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한지에 모필로 필사한 초사본으로 황색의 겉표지에는 서명과 함께 ‘丁卯寅月旬日’이라 적은 명문이 있어 필사시기를 1927년 무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발이나 목차 없이 곧바로 본문이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일개인이 자신만 참고할 의도로 작성했던 사본이라 여겨진다. 겉표지의 뒷면에는 목판본『동의보감』의 본문이 배접되어 있다. 아마도 오랫동안 보아오던 책이 낡고 헐게 되자 필요한 내용만을 간추려 옮겨 적고 낡은 책장의 일부를 겉장에 덧대어 재활용한 것이리라.

또 표지 이면에는 ‘冊主 泗南面 佳川里 崔○○’란 명문이 보인다. 기재된 곳을 찾아 확인해 보니,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속하는 지역인지라 지방에 살면서 인근 대소가와 지역주민들의 병을 돌봐주던 시골의원의 경험방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은 『동의보감』풍문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첫머리 中風微漸 조에서 첫 문장인 “凡人初覺食指次指, 麻木不仁, 或不用, 三年內 必中風之候也, 宜先服愈風湯.”이라는 요점만을 취하고 곧바로 유풍탕 방문을 옮겨 적어놓았다. 곧이어 창출, 석고, 생지황, 강활, 방풍, 당귀, 만형자, 천궁, 세신, 황기, 지각, 인삼, 마황, 백지, 감국, 박하, 구기자, 시호, 지모, 지골피, 두충, 독활, 진교, 황금, 백작약, 감초, 육계 등으로 이루어진 처방 구성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동의보감』본문에 유풍탕이란 처방이 보이지 않는다. 가만히 찾아보니 몇 장 건너뛰어 羌活愈風湯조에 실린 여러 항목 가운데, ‘一名, 愈風湯’이라고 말한 『단계심법』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중풍의 예방과 병후 조리에 두루 쓰이는 강활유풍탕이 원래 유풍탕과 같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 寒門에 이르러서는 대강활탕을 위시하여, 구미강활탕, 사역탕, 대시호탕, 불환금정기산, 향소산, 십신탕, 인삼패독산, 향갈탕, 궁소산, 승마갈근탕, 소시호탕 등이 기재되어 있다. 치법에 대해서는 陰陽症通治와 陰極似陽, 陽極似陰 등 몇몇 소수의 이론만을 발췌해 두고 있어, 복잡한 이론을 전개하기보다는 간단하고 유효적절한 방제만을 선택해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나머지 육음질환이나 여러 가지 잡병을 건너뛰고 瘟疫部가 등장하는데, 풍한에 이어 급성 감염병에 대한 구제방안이 긴요하다고 여긴듯하다. 치법 가운데, 요새 전국에 퍼져 유행하는 바이러스 질환에 참고해 볼 만한 것도 눈에 띤다. 예컨대, “衆人病一般者, 是天行時疫, 治有三法, 宜補宜散宜降.”이라 했고 또 “春發溫疫, 宜葛根解肌湯, …… 冬發濕疫, 宜甘桔湯, 表證用荊防敗毒散, 半表裏證用小柴胡湯, 裏證用大柴胡湯, …….” 같은 문구가 보인다.

이와 함께 疫癘가 유행할 때, 음양과 표리를 가리지 않고 聖散子를 나을 때까지 연달아 먹으라 했고 時行瘟疫으로 두통과 극심한 열(壯熱)이 지속될 때에는 시호승마탕을 쓴다고 하였다. 또한 天行瘟疫에 청열해기탕, 십미궁소산, 신수태을산, 가미패독산 등의 방제를 응용한다 했으니, 지구촌 전역을 휩쓸고 있는 세계적 위난에 직면해 한의학적 대처법을 폭 넓게 궁리해 볼 일이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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