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화수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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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화수미제
  • 승인 2020.03.0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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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
박혜원
장기한의원

12년간 꾸준히 즐겨보던 미드 ‘빅뱅이론’이 시즌 12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주인공 중의 하나인 천재 물리학자 쉘든 쿠퍼는 그야말로 대단한 편집증 환자인데, 특히 자기가 정한 마무리를 짓지 못하면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까지 심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내내 기분이 찜찜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역에서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미제’괘를 64괘의 가장 마지막에 두었다. 심지어 이미 마무리가 된 기제괘보다 형통하다고 보았다. 그건 대체 무슨 이유일까?

미제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미제는 형통하다. 작은 여우가 거의 건너서 그 꼬리를 적심이니 이로울 바가 없다.

형통한데, 이로울 것이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작은 여우는 여울을 총총 건너서 꼬리를 적시지 않고도 맞은편 기슭까지 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방심했던지, 물이 생각보다 깊은 곳이 있었던지 결국 꼬리를 적시고 말았다. 애를 쓴 것이 마지막에 엎질러진 것이다. 그러니 이로운 것은 없다. 그런데 형통하다는 것은 왜일까?

일단 초효를 보자.

初六 濡其尾 吝

초육은 꼬리를 적심이니 인색하다.

물이 가장 깊은 가운데를 건너 기슭 근처까지 갔을 때에는 작은 여우가 꽤 우쭐했을 것이다. ‘이거 별거 아니네?’하고 쉽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슭에 다다르기 전에 발이 푹 빠지고 꼬리가 젖는 경험을 했으니 혼비백산 했을 것이다. 이런 경험 이후로 여우는 물 공포증이 생겨 더 이상 물가에는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다 되어 가던 일이 엎어질 때의 좌절이란 겪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그러니 인색하다.

九二 曳其輪 貞 吉

구이는 그 수레바퀴를 당김이니 바르게 해서 길하다.

수화기제의 초육에서 나왔던 수레바퀴 이야기가 여기서도 나왔다. 그러나 수화기제의 초육에서는 그저 ‘허물이 없다’고 했을 뿐인데, 미제괘의 수레바퀴는 바르게 해서 길하다고 한다. 심지어 2효는 음의 자리라 양효인 구이의 정당한 자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象曰 九二貞吉 中以行正也 (상에 이르기를 구이가 바르게 해서 길하다 함은 中으로써 바름을 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원래 자기 자리가 아니지만 내괘의 중앙을 차지했으니 자기 할 일을 바르게 알고 행해야 한다. 구이의 역할은 자기 짝인 육오를 보필하는 일이고, 육오는 원래 양의 자리인 5효에서 자기에게 버거울 수도 있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 수레를 몰아 강을 건너면 육오에게 빨리 돌아갈 수 없다. 강을 건너면 구이에게 더 이익이 될 만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이는 수레를 멈추고 기다린다. 구이의 역할은 육오의 짝이 되는 것이며, 육오를 돕기 위해서는 외괘의 가운데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六三 未濟 征 凶 利涉大川

육삼은 미제에 가면 흉하나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가면 흉한데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니 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이것은 아마 시간 순서의 문제일 것이다. 강을 건너지 못할 상황에 가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흉하다. 갖은 고생이 눈에 보이듯 훤하다. 그래도 결국엔 강을 건너야 하고, 그래야 이롭다. 마치 유리에게 태자 자리를 내어준 비류와 온조처럼, 이쪽에 남아 있어봐야 존재만으로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렵더라도 가슴에 큰 뜻을 품고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

九四 貞 吉 悔亡 震用伐鬼方 三年 有賞于大國

구사는 바르게 하면 길하여 후회가 없다. 움직여 귀방을 쳐서 삼년만에야 대국에서 상이 있다.

기제괘의 구삼에서 나왔던 귀방이 여기에도 나온다. ‘소인을 쓰지 말라’고 했던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3년씩이나 이어지는 전쟁은 지리하고 고되다. 소인은 3년은 커녕 석 달도 견디지 못하고 자기 것을 챙겨 나몰라라 달아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제괘의 구사는 3년을 견뎠다. 보상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묵묵하게 자기 할 일을 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3년만에 귀방은 정복되었고, 그 전쟁을 수행한 장수에게는 상이 주어졌다. 개인적으로 기제괘와 미제괘를 비교해서 볼 때 이 부분이 가장 재미있다. ‘소인을 쓰지 말라’는 것은 전쟁 전의 권고여야 하고 ‘상을 받았다’는 전쟁 후의 일일 것인데, 전자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하는 기제괘에, 후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미제괘에 있다. 공과는 일이 끝나야 따질 수 있지만 올바른 행동은 기한을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다. 소인을 쓰고도 잘 되는 경우는 드물지만 올바른 행동이 반드시 보상으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나에게 이 효사는 내가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 괴롭다면 참고 계속 가라는 뜻으로 보인다. 결과값이 고정되어 있지 않은 ‘미제’이기에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이다.

六五 貞 吉 无悔 君子之光 有孚 吉

육오는 바르게 하여 길하며 후회가 없다. 군자의 빛이 믿음을 두니 길하다.

원래 양의 자리에 음효가 있으니 흉해야 마땅하지만 길하고 후회가 없다고 한다. 그것은 구이가 저 아래에서 육오의 짝으로서 자기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기 때문이며, 육오는 구이를 믿고 자기가 맡은 바 소임을 바르게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길하다.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미제의 상황에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내괘와 외괘의 중앙을 차지한 구이와 육오가 서로 음양응을 이루고 믿으며 중심을 잡으니 마치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上六 有孚于飮酒 无咎 濡其首 有孚 失是

상육은 믿음을 두고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으나, 그 머리를 적시면 믿음이 있어도 바름을 잃는다.

상육의 자리면 이제 거의 다 왔다. 괘사에서 나왔던 작은 여우가 강 건너 기슭에 다다른 것이다. 일이 좋게 마무리가 되어갈 것 같으면 축하의 의미로 즐겁게 술을 마시는 것은 옛날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머리를 적신다는 것은 지나치게 술을 마신 것이다. 작은 여우가 강을 다 건너 와서 꼬리를 적신 것처럼, 음주가 과하여 실수를 하게 되면 지금까지 공들여 이룬 것들을 그르칠 수도 있다. 한참 유명세를 타다가 음주 운전으로 잊혀진 연예인이 하나 둘이 아니듯이, 고지가 눈 앞에 보일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

미제괘의 효사를 하나씩 들여다보면 안타깝다. 기다리고, 행동을 조심해야 하며, 다 된 것 같을 때에 일이 안 되고 만다. 완성에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완성 이후에도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젊은 날의 아주 큰 성공 이후에, 두 번 다시 자기 자신의 그 벽을 뛰어넘지 못하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굳어진 이미지를 버리지 못해 그 이후의 어떤 역할에도 호평을 받지 못하는 배우들도 있다. 그러나 미완성은 다르다. 완성을 향한 노력도, 열정도, 실패에서 오는 경험도 모두 내가 가진 원동력이 된다. 결과값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 기제괘의 여우는 강을 건너기 전에 꼬리를 적시고는 건너기를 포기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들어 강물이 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여우다. 미제괘의 여우는 어리고 아무것도 몰라 깊은 강에도 생각없이 뛰어들지만, 그래서 닥친 위험에 당황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결국 강 건너 기슭으로 건너간다. 미제괘가 형통하다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안전한 내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은 안락할지 몰라도 나의 모든 세계가 그 울타리 안에 고정되어 버린다. 울타리 같은 것이 아예 없다면 나의 세계는 끊임없이 확장하고 팽창된다. 그러니 내가 정한 기준에 다다르지 못했다고 해도, 그 어느 순간 넘어지고 엎어지고 일이 틀어진대도 너무 좌절하지 말자. 이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저 완성되지 않은 한 순간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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