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898> - 『海東異蹟』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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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898> - 『海東異蹟』③
  • 승인 2020.01.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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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mjmedi@mjmedi.com


해동성국에 神仙이 나르샤

내친 길에 장한웅 이외에 해동국에서 나온 신신 도사 몇 사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김가기를 꼽을 수 있는데, 그에 대한 수많은 사적 가운데 唐나라 시인 章孝標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신라인 김가기를 배웅하면서 지어준 시가 사전에 전해진다.

 

그 시에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고 당나라 말을 하나 해가 뜨는 곳을 바라보고 고향을 그리워하네.… (중략) …생각건대 문장을 동이의 음악에 맞추면서 선도 복숭아꽃 속에서 인삼에 취하리라.”고 노래하였다. 당나라 시인에게 신라가 해동의 신선국으로 고유문화를 지닌 불로장수의 이상향으로 인식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신라 신선 김가기의 전은 여러 군데 보이는데, 『列仙傳』 속편인『續列仙傳』과『太平廣記』에 등장하며, 道藏 안에도 김가기전이 들어 있다. 또한 이 자리에서는 진즉 양생도인서인 『赤鳳髓』를 소개할 때 김가기에 대한 신선사적을 소개한 바 있다.(860회, 그림으로 전하는 신라인 김가기의 導引法, 2019.3.14.일자.)

그럼 이제 의약과 관련하여『동의보감』에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진 北窓 정렴(1506~1549)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태어날 때부터 신기하고 이상하였다. 어렸을 때 산사에서 선가의 六通法을 시험하려고 3일 동안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물을 바라보니, 산 너머 1백리 밖의 일까지도 통달하였다. 이로부터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중국어 및 기타 외국어 등을 모두 배워서 스스로 통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비록 천리 밖의 일이라도 생각하지 않다가 생각만 하면 곧 알아내었다.”

정렴이 훗날 중국에 갔을 때 우화 한 토막. 奉天殿에서 한 道士를 만났더니, 도사가 해동국에도 도사가 있느냐고 물었다. 정렴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三神山이 있어 한낮에도 신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항상 볼 수 있으니, 무엇이 그리 귀할 게 있겠소?”하니 도사가 크게 놀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반문하였다. 정렴은 즉시 『黃庭經』, 『參同契』, 『道德經』, 『陰符經』등의 道書를 들어, 신선이 되는 단계를 훤하게 설명하니, 도사는 그만 기가 질려 굽실거리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고 한다.

조선 조정에서는 정렴이 천문, 의약, 율려에 통달했다 하여 掌樂院의 主簿 벼슬을 주고, 이어 관상감과 혜민서의 교수로 등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외직인 포천현감이 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楊州의 掛羅里에 은거하였다는데, 산골 깊숙이 숨어 속세와는 발걸음을 끊고 煉丹火候法을 수련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렴은 본디 허약함을 걱정하여 항상 자신이 병세를 헤아려 하인에게 아침저녁으로 약을 달리 쓰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는 입을 꼭 다물고 똑바로 앉아서 식사 때를 기다리고 해가 뜨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열어 말을 하였다. 밤에도 또한 단정하게 앉아 새벽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그는 44세의 나이에 자신에 대한 挽歌를 지은 다음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坐化)고 전한다.

정렴의 동생인 정작(1533~1603)은 호가 古玉으로 역시 異人이었다. 형을 따라 수련하는 법을 터득하였고 혼자 살면서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시에 능하였다. 또 醫方에도 깊은 지식이 있어 신묘한 효험이 많았다.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는데, 1596년 『동의보감』을 편찬할 때, 儒醫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72세에 이르러 하찮은 병을 얻어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은 많은 異蹟과 신선도술로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동의보감』편찬에 큰 영향을 미친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의학인물열전』(2010)에 자세한 사적이 수재되어 있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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