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명소기행 09] 태실과 장태의식, 장릉(莊陵) 단종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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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명소기행 09] 태실과 장태의식, 장릉(莊陵) 단종역사관
  • 승인 2019.02.2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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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mjmedi@mjmedi.com


소재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사적 196호
◇장릉전경

이른 봄기운이 살짝 느껴지는가 싶던 주말, 우연찮게 들린 비극의 어린 임금 단종의 능역에 들어서자 이상하리만큼 매서운 칼바람이 느껴졌다. 서울과 경기 일원의 여러 왕릉과 묘역을 둘러보았지만 장릉(莊陵)은 배치가 다른 곳과 다소 달랐다. 우선 정문에서 곧장 능선으로 이어져 능역에 오르는 길목은 소나무 숲길로 평탄하게 이어지는 다른 왕릉과 달리 무언가 힘든 느낌을 가져다주었고 능역앞도 강파르게 이어져 참배객이 여럿 서있기에도 충분하지 못할 정도로 비좁게 느껴졌다. 능선 밑으로 내려다보이는 정자각과 능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보아 원래 참도를 거쳐 능역에 오르기에는 더욱 가파르고 힘들 것이다. 게다가 왕후와 같이 합사되지 못하고 홀로 영월 땅에 모셔진 것도 애잔함을 더해 준다. 『동의보감』 사업 때문에 남양주의 광해군 묘역에도 두어 번 들렀던 적이 있지만 북향의 산자락 능선 곁에 비좁게 자리 잡은 터가 몹시 서글프게 보였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광해임금은 제주와 강화도의 유배생활을 잘 견디고 천수를 누렸으며, 왕비와 합장되어 있어 그나마 다행이랄까.

단종은 문종의 외아들로 세종 23년(1441년) 태어나 12세인 1452년 조선 제 6대 임금에 올랐으나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쫒겨 났다. 그의 재위기간은 3년 남짓이었지만 정종이나 예종, 인종 등에 비하면 최단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재위 초년에는 고명대신인 황보인, 김종서 등이 섭정했고 계유정난 이후에는 숙부인 수양대군이 섭정했으니, 역시 온전히 임금노릇은 해보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한 셈이다.

그 후 금성대군을 비롯한 단종 복위 운동의 여파로 1457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었고 그해 10월 24일 17살이 나이로 사약(賜藥)을 받고 승하했다고 되어있다. 『세조실록』에는 단종이 자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 『숙종실록』에는 의금부 도사 왕방연이 단종을 찾아가 차마 아무 말도 못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자가 그를 해하였다고 적혀 있다. 한편 이광수가 지은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는 활줄로 목을 졸라 교살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세종의 왕세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영민하였고 문종에 이어 장자적통의 계보를 이을 재목으로 왕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어린 나이에 비운의 운명에 휩싸인 나머지 억울하게 한을 품고 생을 마감한 탓인지 사후 무속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런 탓인지 능묘를 찾은 참배객 중에는 새해 소망을 기원하는 가족들도 보였으며, 그중에는 어린 자녀들에게 부모의 장수를 기원하라는 웃지 못 할 부탁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또한 장릉은 제196호 국가지정 사적지이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가운데 한 곳이라 능역은 격식에 맞추어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출구 쪽에 단종역사관이라고 이름 붙은 사료전시관이 건립되어 있었다. 때마침 특별전시관에는 태실봉안기록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태실 봉안과 개축에 관련된 의례와 역사기록들을 한데 모아 보여주고 있었다.

세종은 1441년 왕세손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앞에 손자의 태실을 설치하도록 했다. 살아생전에 세종의 손자 사랑과 비명에 죽은 단종의 운명이 엮여진 탓인지 묘하게도 숙종대에 이르러 세종과 단종의 태실에 문제가 발생되자 이를 다시 보수하여 개축하게 되었다. 전시관에는 당시 이 과정을 기록한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世宗大王端宗大王胎室修改儀軌, 1734)를 바탕으로 전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역사관 태실수개의궤 전시

왕실의 태실봉안을 비롯한 장태(藏胎)의식은 생명존중 사상과 함께 태교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하나의 민간 풍습으로 희미하게 퇴색된 장태의식은 『동의보감』 안에도 고스란이 보전되어 있다. 잡병편 부인문에는 안산을 위한 산실과 태의(胎衣) 곧 출산후 태반을 간직할 방위를 정하는 법을 설명하고 도표로 만들어 수록해 두고 있다. 설명에 따르면 산달의 월덕(月德) 방향에 산실을 설치하고 월공(月空) 방위에 태반을 거두고 출산 시에 나온 오물도 그 방향을 향해 버리라고 지정하였다.

아마도 출산과 새 생명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길한 방위와 모태에서 배출된 구각을 다른 방향에 버림으로써 단절과 생명의 새 출발을 구분 지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의학적으로는 물론 산욕과 같은 위험에서 산모를 보호하고 영아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예방적 처치임에 분명하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는 출산 후 산욕産褥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세종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갓 태어난 왕세손의 양육을 부탁하였다. 이래저래 세종과 단종은 태생부터 뼈아픈 인연으로 이어져 있던 셈이다. 세종대로부터 『구급방』, 『창진방』, 『태산집』을 간행 배포하기 시작하여 후대 언해의서 간행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20190210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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