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원 칼럼] 몸맘하나 멘탈클리닉<30> 나는 누구인가
상태바
[강형원 칼럼] 몸맘하나 멘탈클리닉<30> 나는 누구인가
  • 승인 2019.02.01 06: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형원

강형원

mjmedi@mjmedi.com


한방신경정신과 교수

"어머니는 언제까지 저를 무대 위에 세우실 겁니까? 그만큼 분칠하고 포장해서 박수 받으면 되셨잖아요" …… "어머님 뜻대로 분칠하시는 바람에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고 근 오십 평생을 살아왔잖아요” ……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고요!”...

위 대사는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JTBC 금토드리마 <SKY 캐슬>에서 정준호(강준상역)의 눈물 섞인 절규들이다. 남들이 말하는 최고의 가문과 학력과 직업을 소유한 사람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질문이 있다. 태어나서 한 번 쯤은 나에게 던져야 할 또 나에게만 답이 있을 물음, ‘내가 누구일까?’

진료실이라는 공간은 조금은 특별한 장소이다. 그 곳이 믿음과 안전의 장소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해준다. 나는 더 많은 강준상님을 알고 있다. 나이와 성별과 다른 위치에 있음에도 그들은 동일한 질문들을 던진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많이 아프다고... 말이다.

내가 뭘 원하는지, 누구 때문에, 무슨 눈치를 보느라고... 여기에 서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들은 이야기한다. 저만치 지나버린 과거들은 있는데 나를 찾을 수가 없다고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누구인가’ 라는 인류의 대명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내가 뭘 좋아하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나는 언제 행복하지?’ ... 나 자신에게 던진 질문들은 서서히 자기연민을 거쳐 자기성찰로 이어지게 한다. 사회가 복잡하고 추구하는 이상향이 다변화될수록 나다운 단순성을 찾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 삶의 궁극적 목표가 ‘참된 자기(self)를 찾는 여정’이라 말하지 않는가.

자기(自己), 자아(自我), 자신(自身)이라는 용어는 심리치료 영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자기도 의식 못하는 무의식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충격인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활동이 현재 행동과 이어져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고 복잡한 문제의 이유를 비로소 대면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때부터 비로소 이해가 시작된다.

무의식이든 의식이든 이렇게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의식(自意識)의 깨달음에 의해 가능해진다. 자의식은 곧 내안에 일어나고 있는 것을 내가 떨어져서 바라보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의식(consciousness)’은 깨어 있는 ‘각성(alertness)’과 주위와 자신에 대하여 아는 ‘인식(awareness)’을 합하여 일컫는 말이다. 인식(awareness)은 인지영역인 지남력, 기억력, 언어력, 판단력, 시공간기능과 정서영역인 감정을 다 포함한다. ‘자의식(自意識)’ 혹은 ‘자기의식(自己意識)’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식을 ‘자기(自己)’가 알아차리고 있는 ‘자각(自覺, self-consciousness or self-awareness)’ 상태를 말한다.

자의식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해 생기는 증상은 많다. 문제를 더 크게 보거나 혹은 훨씬 더 작게 보게 만들어버린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어떤 감정인지도, 어떤 기분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외부로 표출되며 매우 거칠어진다.

자기를 볼 수 없는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문제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자각하지 못하는 심리적 갈등을 신체화시켜 증상으로 키우고 치료를 위해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기 일쑤다. 이러다보니 삶의 만족이 있을 리 없다. 불평과 원망으로 인한 증오심이 가까운 사람들과 끝임 없이 갈등을 일으켜 크고 작은 복수심에 시달린다. 자신에 대한 이해도 자신에 대한 감정도 알아차리기 어렵고 그럴수록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인정욕구만 강하게 작동한다. 이런 유형의 성격은 히스테리성 성격경향에서 많이 보이는 증상들이다. 임상에서는 전형적인 화병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경향이 많다.

매번 진료실에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환자분들은 밀려있는 외래환자들 틈에서 치료자의 인내를 테스트하곤 한다. 치료자의 말을 들을 생각은 애시당초 없는 듯이 자신의 힘든 얘기, 가족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얘기, 세세하게 사건의 전말과 본인의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정리없이 펼쳐놓는다. 이야기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멈출 줄 모른다.

70이 넘은 할머니의 분풀이도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맞벌이하는 딸 손주 키워주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딸이 기분에 따라 아이를 학대수준으로 패고 욕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려면 가슴이 벌렁거려 차마 볼 수 없었다. 놀라 손주를 감싸 안고 못하게 하면, 오히려 대들며 엄마가 날 이렇게 때렸지 않느냐고, 엄마가 날 이렇게 키웠노라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그땐 그런 적이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는데, 명문대까지 보내줬더니... 서럽고 화가 치밀어 잠도 못자고 눈물만 나오더라는 것이다.

더 서럽고 힘든 것은 엄마보기를 남 보듯 하는 거란다. 옆에 두고도 말도 안 섞고 남편하고만 자기 아들하고만 얘기하더란다. 이러기를 벌써 2달째. 견디다 못해 찾은 진료실 방문 때마다 이어진 하소연이 매번 같은 레파토리(repertory)이다.

이런 ‘레파토리 신드롬(repertory syndrome)’은 어떻게 하면 멈춰질 수 있을까?

치료자로서 충분한 감정표출이 일어날 수 있도록 안전의 장을 마련해주는 것과 지지, 격려 그리고 공감이 일시적 카타르시스는 맛볼 수 있게 해주지만 반복적인 패턴을 멈추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시 그 환경 속으로 들어가면 압도되는 감정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진료실에서의 수용적 재경험이 일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방법이 ‘자의식’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내 인생 모든 것을 내가 주관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때 그곳에서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대한 집중을 의미한다. 나에게서, 혹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속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줄기와 가지를 구분하여 보듯 떨어져 보는 관찰하는 의식을 말한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는 의식의 상태에 머물러 자기의식을 가지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치료자로서 하는 일은 내담자로 하여금 자의식을 갖도록 하는데 있다. 끊임없이 내담자의 감정과 갈등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의식화 작업을 고민하게 된다. 갈등의 원인과 내용을 화제 거리로 삼기보다, 힘들어하는 내면을 볼 수 있도록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진료실 내의 소품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호흡, 심장소리 등과 같은 신체의 일부분에 귀 기울여보도록 이정변기(移精變氣)시켜보기도 한다. 내안의 감정, 기억, 사건들을 비판자, 감시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관찰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길가의 나뭇잎을 보고 파랗다, 무늬가 아름답다, 흔들린다. 이렇게 사실적 표현을 그대로 기술하거나, 하늘의 구름을 보고 그대로 표현하거나 하는 방법으로 연습은 가능하다.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잠시 멈춰서 내면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의식이 생겼을 때는 더 이상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휘둘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길을 가겠다는 의지 표명이 이뤄지게 된다. 내가 함부로 취급당하는 상황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선언적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 누구 처럼이 아니라 나처럼 내가 살겠다는 강한 결단이기도 한다.

치료자로서 내담자가 자의식을 갖도록 돕는 것은 기다림이 요구되는 긴 작업이다. 끊임없이 자의식을 가지고 자기 안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옆에서 같이 고민하고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정신치료라는 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자의식’을 갖도록 끊임없이 고민하고 치료자와 함께 연습해가는 과정이다. 내담자에 대한 믿음과 기다림이야말로 치료의 비결인 셈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