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규칙(醫士規則), 근대 한의학의 시원(始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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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규칙(醫士規則), 근대 한의학의 시원(始原)
  • 승인 2018.12.28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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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아

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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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조선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광무개혁을 실행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1896년 을미개혁이 외세 의존적이고 외국 제도를 모방한 데에서 비롯하였던 것을 반성하고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참조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군제(軍制)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대적인 개편을 필두로 최초의 헌법인 “대한국제(大韓國制)”를 반포하여 “대한국은 세계만국에 공인된 자주 독립한 제국”임을 선언하였다. 광무개혁을 주도한 인물은 윤용선(尹容善), 심순택(沈舜澤), 박정양(朴定陽), 민병석(閔丙奭), 심상훈(沈相薰), 박제순(朴齊純), 민영환(閔泳煥), 조병직(趙秉稷), 조병식(趙秉式), 신기선(申箕善), 윤웅렬(尹雄烈), 한규설(韓圭卨), 권재형(權在衡), 이재순(李載純), 이용익(李容翊)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고종의 측근들이었으며, 몇몇을 제외하면 대체로 보수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광무개혁은 황제와 정부 주도의 개혁이었던 만큼 그 실행 범위가 전 국가적으로 광범위하게 설정되었다. 국가 및 사회 제도에 있어서 1876년 개항 이후 누적되어 온 근대화의 요구를 반영하되 서구열강에 대한 일방적 모방이나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주요 내용을 들어보면, 우선 경제적인 면에서 토지소유증서[地契]의 작성과 토지소유주의 등록을 법제화하였다. 상공업 진흥정책을 실시하여 섬유·철도·운수·광업·금융 등 분야에서 근대적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거나 민간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이들 분야의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거나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조치가 동시에 행해졌다. 도량형제도를 새로 제정·실시하였다. 통신·교통 시설을 개선하여 우편·전보 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되었고, 서울·인천·평양·개성 등지에 전화가 개설되었다. 외국인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경인선·경부선·경의선의 철도가 개통되었다. 서울에 발전소가 건설되어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운행되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개혁이 있었다. 호적제가 시행되고, 재판소구성법(裁判所構成法)이 제정되어 재판소의 위치와 관할이 재조정되었으며 순회재판소가 설치되었다. 관리들은 복장으로 양복을 입었고, 1902년에는 단발령이 재차 내려져 관리·군인·경찰이 상투를 자르게 되었다.

광무개혁의 중단 시기는 1904년 러일전쟁 또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본다. 이때부터 일제의 주권침탈이 노골화되어, 특히 국가 주권의 주요한 부분인 외교권이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1897년부터 1905년까지 채 1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대한제국은 국가의 여러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화로 가기 위한 개혁 방안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법제를 마련하였으며, 그 시행을 시도하였다. 보건의료분야에서도 근대적 면모를 갖추기 위한 제도와 조치를 시행하였는데, 관립 ‘의학교’ 및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의 설립과 운영, “의사규칙(醫士規則)”의 반포, 국립병원인 광제원(廣濟院)의 설립과 운영 이 세 가지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의학교’ 및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의 설립은 의료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국가 공식 교육기관의 필요에 대한 요구를, “의사규칙(醫士規則)”의 반포는 의료인에 대한 근대적 면허제도의 도입과 시행에 대한 요구를, 광제원(廣濟院)의 설립은 대한제국의 복지국가로서의 위상과 대국민 구료기관에 대한 요구를 각각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중 특히 주목하여 볼 것은 “의사규칙(醫士規則)”의 제정과 반포라고 사료된다. 의료인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적 교육기관이나 대민 구료기관은 그 설립과 운영 방식의 체계성에서 차이는 있더라도 전근대 사회에도 존재하였던 것이나, 의료인에 대한 자격 규정과 인허가 제도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900년 관보에 내부령 제27호로 반포한 “의사규칙(醫士規則)” 제1조에는 의사(醫士)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第1條 醫士는 醫學을 慣熟하여 天地運氣와 脈候診察과 內外景과 大小方과 藥品溫凉과 針灸補瀉를 通達하여 對證投劑하는 者를 云함

 

대한제국이 의료인 기준 마련을 위해 제정한 규칙은 1900년 1월 2일 의사규칙(醫士規則), 약제사규칙(藥劑士規則), 약종상규칙(藥種商規則) 세 가지로 반포되었다. 따라서 의사규칙(醫士規則) 상의 의사(醫士)는 우리나라의 현재 이원화된 의료제도 하의 의사가 아니라 약제사 및 약종상과 구분되는 의료인을 한 가지로 일컫는 용어이며, 그 내용을 보면 전통의학에서 한의사가 시행하는 의료행위를 주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제국에서 근대적 면허 제도를 적용할 의사(醫士)는 전통의학을 수행하는 한의사를 위주로 서양의학의 지식과 신기술을 습득한 의료인을 포함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는 광무개혁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제2조에 “醫科大學과 藥學科의 卒業證書가 有하며 內部試驗을 經하여 인가를 得한 者外에 醫藥을 行치 말 事”, 제7조에 “內外國人을 毋論하고 認許狀이 毋한 者는 行術業을 得치 못할 事”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는 의과대학과 약학과의 졸업 자격을 갖추고, 내부 시험을 통과하여, 인허장을 교부받은 자에 한해 의술업을 행할 수 있다는 것으로 현재의 의료인 면허제도가 갖춘 3가지 요소를 모두 구비한 것이다. 이 중 제2조에 적시한 ‘의과대학’에 대하여, 혹자는 당시 1899년에 설립되어 있던 관립 ‘의학교’의 교수과목이 전통의학이 아닌 서양의학의 해부, 생리 등 과목 위주였던 것을 들어 향후 대한제국의 의사(醫士)들이 서양의학 전공자 위주로 대체될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규칙(醫士規則) 제2조에 적시한 ‘의과대학’은 당시 대한제국에 설립되어 있지 않았던 교육기관이었다. 제2조의 뒷부분에 “의술 우열을 위생국에서 시험하여 내부대신이 인허장을 급여”하는 과도기적 조치를 취한다는 단서 조항이 있는 것으로 그렇게 판단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사규칙(醫士規則) 제정 당시 제1조에 규정한 ‘의사(醫士)’를 길러내기에 적합한 ‘의과대학’의 설립을 염두고 두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그 ‘의과대학’은 전통의학인 한의학의 교수(敎授)를 대부분 또는 상당히 포함하는 교육과정이 되었으리라 짐작해볼 수 있다.

광무개혁은 국가 재정의 어려움과 일제에 의한 주권침탈 그리고 채10년이 안 되는 시간적 제한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 만족할만한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된 개혁이었다. 나아가 근현대 한국의 법과 제도, 문화의 시원(始原)으로서 결코 낮추어 볼 수 없는 광범위한 제도를 입안하고 시행하였다. 보건의료분야에 있어서도 근대화의 핵심 요소인 면허제도의 시원(始原)이 대한제국 시기의 “의사규칙(醫士規則)”이며, 그에 규정한 의사(醫士)가 주로 ‘전통의료를 행하는 한의사였음’의 의의를 결코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광무개혁 [光武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근대의학의 기원] (박윤재, 혜안, 2005)

[의사규칙] (대한제국 관보, 1900)

 

류정아(柳姃我) /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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