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명소기행 04] 마량진(馬梁鎭)과 빗겨간 동서의학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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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명소기행 04] 마량진(馬梁鎭)과 빗겨간 동서의학의 조우
  • 승인 2018.11.02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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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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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비인로 89-16

 

주말 아침 지역방송에서 방영하는 기행 프로그램을 보니 마침 서천군 일대의 가볼 만한 명소를 차례로 소개하고 있었다. 내용 가운데 조선 순조 때 서해안에 잠시 정박한 영국함선에서 조선인들이 양식(洋食)을 대접받고 서양식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써서 식사하였다는 내레이션을 보고 갑자기 눈이 크게 떠졌다. 왜냐하면 바로 전날 『우리 생활 100년』 식생활편을 읽다보니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서양 음식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1894년 일본에 갔던 김기수로, 그를 비롯한 조선의 수신사 일행에게 서양식을 흉내 내어 양식을 준비한 만찬장에서 조선인들이 불편하고 어색한 양식기 대신 젓가락으로 양식을 맛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이 가장 먼저 양식을 맛본 기록일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에게 발행한 『일류스트라시용』이라는 신문에는 커다란 식탁 위에 차려진 서양식 만찬장 풍경 속에 분명히 갓을 쓴 조선인이 양식기에 담긴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느라 애쓰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마량포 앞바다에서 있었던 영국함선에서의 서양식 식사는 우리 식생활사에서 처음 맛보는 양식인 셈이고 그것도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무려 100년 가까이 앞선 시기라서 상당히 의미 있는 사실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요즘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전통 식치(食治)연구와 관련해서 한층 더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만사를 제쳐 두고 한걸음에 쫒아가 보기로 하였다. 한가위 명절이 지난 뒤 오래지 않은 터라 길은 한산했으며, 반월형으로 만을 형성한 포구는 좌우가 모두 바다 물결에 반사된 햇살로 인해 생긴 윤슬로 가득했다.

바실홀의 항해기에 등장하는 큰 갓을 쓴 조대복과 서기를 그린 그림은 그가 귀향길에 들른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만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흥미와 환성을 자아내었다.

마량포는 조선시대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있던 수군(水軍)의 거진(巨鎭)으로 효종(孝宗) 6년(1655)에 충청도 남포현(藍浦縣)에 있던 설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인근 무창포나 춘장대 해수욕장의 명성에 밀려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마침 위에서 말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서천군에서 ‘성경전래기념관’(관장 이병무 목사)을 새로 건립한 이후로 드문드문 방문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기념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살펴보다가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애초에 이 사적이 전해지게 된 것은 당시 마량진첨사 조대복(趙大福)과 비인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이양선(異樣船)이라 일컫던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의 차음표기) 함선에 탑승하여 조사한 보고서를 기초로 하여 당시 충청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이 올린 장계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 순조16년(1816)7월19일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국 함선 알세스트호의 함장이었던 바실 홀이 조선과 유구(류우큐우, 지금의 오끼나와.) 해안을 조사하고 돌아가 기록한 탐사보고서 『조선과 유구해안의 기행』이 유럽에 알려짐으로써이다.

그런데 전시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알세스트호에는 군의관인 존 맥러드(John Mcleod)라는 인물이 타고 있었으며, 그 역시 이 항해에 대해 소략한 책자( 『Narrative of a voyage in his majesty’s late ship Alceste, to the yellow sea』 )를 펴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든 의사로서의 시각이 담겨지기 마련일 터이니 얘깃거리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채록한 것은 단지 조선말에서 신체부위 언어의 발음을 기록한 몇 가지 것 이외에는 특별히 의약관련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좀 더 자세한 것을 알아보고자 관장님을 찾아뵈었더니 뜻밖에도 군의관 맥러드가 배에 올라탄 조선인을 서양식으로 진찰하였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흥미가 높아져 바실 홀이 남긴 조선항해기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웃픈 얘기가 적혀 있었다.

맥러드는 자신의 배에 올라탄 조선인 가운데 유난히 안색이 창백한 사람을 두고 병이 깊은 것으로 여겨 진찰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직책에 충실했을 뿐이겠지만 조선 관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처음 접하는 이국인들이 자신에게 행하는 것이 그 나라의 예의범절인 걸로 착가하여 모두들 군말 없이 혀를 내밀고 안검을 까보는 진찰을 차례대로 받았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어찌됐던 이 장면은 조선 사람이 서양인 의사에게서 진찰 받은 최초의 사건이 아니었겠나 싶다.

또 그들은 출발에 앞서 이별의 선물로 영문성경을 선사하였으며, 조선 측에서는 부채와 장죽, 토산품을 주었다고 하는데, 유럽에 불로장생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의 인삼을 찾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만약 그들이 뭍에 상륙하여 군영(軍營)이나 마을에 들어가 민간인들과 만나고 좀 더 넓게 접촉했더라면 일찌감치 동서의학이 조우할 수도 있었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들은 그 후 백년이 채 되지 않아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로 조선의 이권을 탐하여 찾아오게 되었지만 첫 만남이 이뤄졌던 마량포에서는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이방인과의 따뜻한 만남이었다.

 

2018. 10. 1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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