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代名醫醫案 (303) - 崔鳴吉의 醫案(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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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代名醫醫案 (303) - 崔鳴吉의 醫案(1)
  • 승인 2017.11.25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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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

김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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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冒治療案

 

○ 藥房提調 崔鳴吉과 副提調 李景憲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臣等이 듣기로 東宮께서 感冒의 증후가 있으셔서 놀라 염려됨을 이길 수 없으니 症錄을 써내려간 후에 모든 의사들과 약을 의논한 후에 아뢰오면 어떻겠습니까?” 이에 “이미 나았으니 약을 의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633년, 인조 11년, 10월 15일) ○ 藥房提調 崔鳴吉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듣기로 東宮의 感冒의 증후가 여전히 아직 發表되지 못했다고 하옵니다. 臣은 우려로 답답함이 지극해짐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感冒가 무릇 몇일되었으니 즉 지금 증후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감히 이를 우러러 여쭙니다.” 이에 “지금 이미 나았다고 한다.”고 답하였다. (1633년, 인조 11년, 10월 17일)

○ 藥房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엎드려 임금님의 답변인 東宮의 症候가 이미 나았다는 하교를 받들고 御醫들의 말을 들어보니, 즉 羌活沖和湯 三貼을 올려 복용한 후에 단지 頭顔이 發汗이 되었지만 煩悶과 咳嗽의 증상은 여전히 있다고 합니다. 약으로 치료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小柴胡湯에 乾葛·羌活·蘇葉·前胡·桔梗·枳殼 各五分, 知母七分, 地骨皮一錢을 加해서 올려 복용시키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藥劑를 들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올린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1633년, 인조 11년, 10월 17일) ○ 藥房提調 崔鳴吉, 副提調 李景憲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東宮의 感冒의 증후는 夜間에 어떠하였습니까? 小柴胡湯을 올려 복용한 후에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까? 感冒가 비록 대단한 증상이 아니지만 오랫동안 發表시키지 않으면 즉 매우 염려할만 한 것입니다. 엎드려 상세하게 알려주시기를 바라오니 어떠합니까? 이에 이미 나아서 회복되었다고 답하였다. (1633년, 인조 11년, 10월 18일) (이상 『承政院日記』)

按語) 崔鳴吉(1586-1647)은 “실용주의적 醫學論을 외친 亂世의 儒醫”로 평가된다. 그는 융통성이 있는 사고를 하는 것이 자신 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 얼마나 이익이 되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崔鳴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1633년에 『鄕藥集成方』의 간행에 직접 관여하여 이의 출판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실용적 유비무환의 정신의 발로였다. 그는 이 당시에 內醫院의 提調였다. 위의 醫案은 崔鳴吉이 內醫院(藥房이라고도 함. 위에는 藥房으로 부르고 있음)에서 提調로 있으면서 東宮 즉 소현세자의 感冒를 치료한 기록이다.

여기에서 처음에 羌活沖和湯을 3첩 투여했던 기록이 나오며, 이것으로 發汗이 이루어져 증상이 많이 호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0월 15일부터 17일까지는 치료가 되었다는 회답이 돌아온다. 그럼에도 10월 17일 崔鳴吉을 중심으로 東宮의 증상은 여전히 煩悶과 咳嗽의 증상이 치료되지 않았다고 말하고는 小柴胡湯의 變方을 권유하고 있다. 小柴胡湯은 『東醫寶鑑』寒門, ‘餘熱不退’에서 “傷寒餘熱不退通宜用小柴胡湯調之”라는 문장에 근거할 때 感冒의 後遺症을 치료하는 처방으로 사용한다. 여기에 더해진 “乾葛·羌活·蘇葉·前胡·桔梗·枳殼 各五分, 知母七分, 地骨皮一錢” 등은 人蔘敗毒散, 蔘蘇飮 등 脈絡의 傷寒表證藥의 일부 藥들을 加하고 있는 것이다.  
           
김남일 /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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