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년 만에 세상의 빛 본 삼방촬요, 인고의 시간 끝에 조부의 소망 이뤄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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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년 만에 세상의 빛 본 삼방촬요, 인고의 시간 끝에 조부의 소망 이뤄냈죠”
  • 승인 2017.10.2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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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예진 기자

전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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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삼방촬요 출간한 이갑섭 행림서원 대표


효종(孝宗)이 북벌 준비하면서 송시열에게 편찬 명해 
처방, 침구, 단품 상세히 상술하며 당시의 경험방 담겨 있어…어느 문화재보다도 귀한 책

[민족의학신문=전예진 기자] 올해 초 ‘삼방촬요’ 번역본이 출간됐다. 효종은 조선의 사정에 맞는 의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에 따라 송시열을 통해 처방·침구·단품(향약요법) 등 세 가지 주제를 다룬 책을 만들었는데 인출되지 못한 채 오랜 시간 창덕궁에 보관되어왔다. 행림서원이 입수한 삼방촬요 원고를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박사와 김남일 경희대 한의과대학 학장이 노력한 끝에 번역본으로 탄생된 것. 그 뒤에는 한의계에 의미 있는 이 책을 반드시 출간해보이겠다는 행림서원 이갑섭 대표가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갑섭 행림서원 대표.

▶올 초 『삼방촬요』를 출간했다. 책 소개를 부탁드린다.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은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온갖 수모와 멸시를 당하시고 귀국해서 인조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다. 왕이 된 효종(봉림대군)은 그 치욕을 설욕하고자 왕위에 오른 후, 북벌을 준비하게 되면서 대비책 중 하나로 우암 송시열에게 향약의서의 편찬을 명한다. 이에 조선 8성 내의 명의들을 궁궐에 불러 들여 각자의 경험비방을 모아 기록하고 편찬된 절세의 진본이 바로 이 『삼방촬요』다. 

그 당시 청나라에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책의 편찬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 있지 않았다. 349년 만에 세상의 빛을 본 중요한 책은 총 11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은 매 병증마다 병의 근원 및 치료법을 논한 것이며 1)처방 2)침구 3)단품(향약요법)을 상세히 상술해 놓았다. 감히 그 가치를 논하자고 한다면 어느 문화재보다도 귀한 책이라 하겠다.


▶『삼방촬요』는 조선시대 때 어떻게 출간되었는지 궁금하다.
『삼방촬요』는 북벌정벌론의 대의를 품으셨던 효종이 전쟁 시, 제일의 처방 약재들이 수입이 안 되어도 백성들의 병 치료에 지장이 없을 것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약재만을 사용하여 처방할 수 있도록 엮으신 책이다. 그러나 효종은 10년 후에 북벌 꿈이 좌절되면서 천고의 한을 품으신 그대로 승하하셨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이 책의 중요성을 아는 궁중 모 요인이 원본 그대로를 완벽하게 필사해서 필사본으로 창덕궁에 보관했었는데, 그 필사본이 모 장서가의 손을 거쳐 구중심처를 나와 70여 년 전에 행림서원에 입수된 것이니 가히 천고의 비적이요, 국내의 고본이라 하겠다. 원본의 행방은 묘연한데 추측하기로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국외로 반출된 것 같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긴 시간 출판 작업을 하면서 고충이 있었다면.
1923년 행림서원을 창립하신 조부(행파 이태호)는 오직 한의서 출판만을 해오시면서 일제강점기 말기 <비장고판조선의서(秘藏古版朝鮮醫書)> 시리즈를 간행하고자 기획하였는데, 첫 번째가 『향약집성방』이었고 세 번째로 기획하셨던 책이 바로 『삼방촬요』이다. 비록 조부님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지만, 조부의 뒤를 이어 3대째 한의서 출판을 해오면서 『삼방촬요』 출간은 필연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방대한 분량과 변해버린 출판사의 재무구조로 인해 출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기간이 꽤 오래 지체되면서 거기에 대한 심적인 고충이 있었다.

◇삼방촬요.


▶『삼방촬요』가 한의학계에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느 문화재보다도 귀한 한의서가 세상에 나왔다. 국의 토종의서로는 허준의 『동의보감』, 사암도인의 『사암도인침구요결』,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황도연의 『방약합편』이 있을 뿐이었고, 이제 마지막으로 『삼방촬요』만 남아 있던 상황에서, 이렇게 국역으로 출간되었으니 그 의미는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페이지마다 효종 당시의 조선의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던 명의들이 정성을 다해 기록한 경험방들로 가득 차 있는데, 거기에다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 경험방들은 현재의 후손들이 연구할 가치가 있는 임상처방들과 민간요법들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한의학이 나아가야 할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 이 책을 연구하고 활용하는 한의사들은 국민들에게 명의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까 생각한다.


▶“『삼방촬요』는 필생의 사업이다”라는 의미는?
효종이 백성들을 위해 명찬한 이 책은 내가 능력이 안 되면 어느 누구의 힘을 빌려서라도 한의학의 발전을 위해서 필히 태어나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출판허가 제153호 승인필’이라는 큼직한 도장이 찍혀 있었던 것을 보면 조부님께서도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그러나 어려운 시절이라 조부는 출판을 못 하시고 타계하셨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도 『삼방촬요』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고, 오직 조부님만이 아셨던 책이다. 그러므로 3대째 한의서 출판을 이어가고 있는 나로서는 언젠가는 이 『삼방촬요』를 출간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필생을 두고 이루어야 할 사업이라 생각했다.
 

▶올해 『삼방촬요』가 출간되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 동안의 과정은?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07년 어느 여름날 두 분이 행림서원을 방문하셨다. 경희대의 김남일 학장님과 한국한의학연구원 안상우 박사님이었다. 혹시 1930년대에 발행된 행림서원 도서목록에 게재되어 있는 『삼방촬요』라는 책을 보관하고 있는지 궁금하셔서 내왕을 하신 것이다. 평소 범상치 않은 모습으로 비춰지던 4×6배판으로 오철로 제본되어 있고 표지는 오래 된 고서의 형태를 하고 있던 책, 나는 두 분이 원하시던 그 책을 서고에서 찾아 드렸다. 

21세기 한의학의 세계를 꿈꾸는 한 일환으로 이 책은 출간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방대한 국역 작업과 제작비용은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다행히도 김남일 학장과 안상우 박사의 포기를 모르는 열정으로 『삼방촬요』의 국역과 출판이 한의학연구원의 『민간의약지식총서』의 제1권으로 기획되었고, 드디어 이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김남일 학장과 안상우 박사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구슬도 꿰어야 보배가 되는 것처럼, 이 방대한 작업은 두 분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이제 한의학계에 널리 보급하는 것이 남았는데 이건 행림서원이 해야 할 몫이다. 사실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힘든 줄 모르고 출판제작은 했지만,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어가고 있는 세태에서 누가 이 오래되고 방대한 분량의 󰡔삼방촬요󰡕를 보겠는가하는 생각이 들면 보급에 크게 자신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학술적ㆍ역사적ㆍ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이 『삼방촬요』는 한의사라면 자신의 서고에 한 권씩 꼽아두어야 할 책일뿐더러, 후대를 이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할 책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쉽지 않은 한의서 출판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신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나 향후 계획이 있는지. 
오직 출판에만 몰두한 지 40년이 되었다. 28세에 월간 『행림』이라는 한의학 학술지도 최초로 창간하였고, 1980-1990년도에 한국에서 최초로 500만부라는 베스트셀러 『인간시장』 외 수백 종의 책을 출판하였다. 한때는 한의학 출판이 답답하게 생각되어, 다른 분야의 출판(문학ㆍ인문ㆍ사회과학)에 힘을 쏟아 부은 적도 있었고 월간 『주니어』와 월간 『마드모아젤』이라는 여성지를 창간하여 신문사, 잡지들과 경쟁도 해보았다. 그러나 대를 이은 한의서는 몇 십 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내 곁에 남아 있다. 이것이 출판인으로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몇 종의 출판물이 남아 있지만, 천천히 느리게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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