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 이 정도는 괜찮아?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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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 이 정도는 괜찮아? No!
  • 승인 2016.09.0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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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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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만나는 마트, 편의점, 커피숍 등에서 수 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를 만난다. 그들의 건조한 인사를 듣고, 볼 때 차가운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양한 인사 속에는 과거에 그들이 겪었을 많은 슬픔이 녹아있는 듯하다. 상대가 ‘고객님’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많은 경험들. 그 경험이 무엇인지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엄청난 희생 속에 유지되고 있다. 그들이 마냥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그들은 또 다른 곳에서 자신들이 당한 것 이상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누군가는 ‘갑과 을의 싸움’이 아니라 ‘을과 을끼리의 싸움’이라고도 한다. 맞는 말이다.

김 영 호
부산 공감한의원 원장
부산광역시한의사회
홍보이사

사회 속에 희망을 안고 던져진 젊은 세대는 지금도 매 순간 아픈 경험을 하고 있다. 먼저 사회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타인에게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사회라는 곳이 이래. 사회생활이 그렇지”라는 명목으로 많은 것들이 묵인되고 있다. 이런 것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건 옳지 않아. 나는 그렇게 하면 안되겠다.”라고 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나도 똑같이 겪었어. 이 사회는 원래 그래”라며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을 병들게 하는 대중의 생각이 떠오른다. “이 정도는 괜찮아”

이 정도는 괜찮다는 주관적인 기준으로 인해 여러 곳이 병들고 있다. 식당에서 손님들은 그들의 ‘이 정도’로 인해 알바생들이나 종업원들에게 막말을 쏟아 붓는다. 식당 주인들은 그들의 ‘이 정도’ 때문에 유통기한이 지난 식자재를 쓰고 반찬을 재활용한다. 도로에서는 운전자들의 ‘이 정도’ 때문에 깜빡이도 켜지 않고 차선을 변경하고, 빨간 신호등으로 바뀐 지 오래되어도 꼬리물기를 한다. 도로위에서 벌어지는 ‘이 정도’의 개념 차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일반 사회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는 괜찮아”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 정도는 괜찮아”라며 층간 소음 배려 없이 마구 뛰어다니는 사람들, 식당에서 자신의 아이들을 뛰어다니게 하는 부모들, 두 대가 주차할 공간의 정중앙선 위에 주차하는 사람들, 지역구민들 무시하고 공천 주는 사람한테만 잘 보이려는 국회의원들, 계약직 직원들 무시하는 회사들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그들의 ‘이 정도’가 존재한다.

‘이 정도’ 에 대한 입장차이가 너무 커져버린 대한민국은 ‘불신’이 깊숙이 자리 잡아버린 것 같다. 때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해 사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함정이 많은 한국에서 저 친구들은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이제 환자들을 믿고 진료해주다간 뒷통수를 맞기 십상이다. 그래서 대형병원들은 더 많은 서약서를 만들어서 만약을 대비하고, 의사들은 환자가 빨리 낫는 치료보다 방어 진료를 하기에 급급하다. 잘 나아서 좋은 소리를 듣는 것보다, 환자의 소송이나 컴플레인으로 생길 수 있는 불이익이 훨씬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슬픈 일이 있다.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어가지만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생계를 위해 불안하고 슬픈 웃음을 지어야 하는 수많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무려 대한민국의 70%다. 그들의 웃음은 본사의 지침이고 그들의 수입이다.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고 억울한 상태로 생계를 위한 서비스업을 계속 강요받을 때 우리 사회는 조만간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가정불화나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 등 사회적 약자와 힘이 없는 아이, 여성을 향한 범죄가 계속 나타날 수 있다. 분노를 표현할 곳이 없으니 약자로 향하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표현과 인정’이다. 나의 감정을 나의 방식으로 편안히 표현하는 장(場)을 가지는 것,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 필요하다. 남들과 조금만 다르면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는 우리 사회의 강요된 시선이 아니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이해한다.”는 인정과 공감의 시선이 꼭 필요한 시절이다.

우리는 “사회성이 좋다” “융통성이 좋다”는 말이 칭찬으로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사회성과 융통성’이 조금 과하다. 잘 안 되던 일도 지인을 통하면 해결되고, 오래 기다려야 하는 일도 식사 한번 하고 나면 빨리 처리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이런 사회 보다는 처음에 조금 답답하더라도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은 이런 사회에 살았으면 한다.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의 가장 큰 장점은 ‘예측이 가능한 사회’라는 점이다. 예측할 수 없는 변수(變數)보다 항상 지켜지는 상수(常數)가 많은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예측 불가능한, 관계의 폭력 속에서도 안전하게 서비스업을 해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 인구의 70%가 이런 ‘안전함’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의 목소리가 곧 우리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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