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714] 효자의 척도가 된 侍病嘗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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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714] 효자의 척도가 된 侍病嘗糞
  • 승인 2016.01.2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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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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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倫行實圖」③


이번 호에는 이 책 「오륜행실도」에 실려 있는 여러 효자, 충신, 열녀 이야기 가운데 의약과 연관성이 높은 예화 몇 가지를 골라보기로 한다. 그에 앞서 조선시대 유교 윤리 덕목 가운데 현실 속에서 ‘仁’을 구현한 가장 대표적이고 모범적인 사례를 살펴보기로 하자. 바로 공자의 제자인 閔子騫(본명 損)의 이야기이다.

 

 

 

 

◇ 「오륜행실도-언해창진방」

 

 

공자의 여러 제자 가운데서 顔淵의 행실이 으뜸이고 ‘一單食, 一瓢飮’으로 安貧樂道하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亞聖으로 추앙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일찍 요절하였으며, 공자의 법통은 曾子가 이어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효자상으로서 구체적으로 행실을 보여주는 사례로는 이 閔子騫의 얘기만한 것이 없다.

간단히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민손은 일찍이 어미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다. 계모는 그의 집에 시집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친자식에게는 솜을 두텁게 넣어 누빈 옷을 입히고 민손에게는 갈꽃을 넣어 만든 옷을 해서 입혔다. 어느 날 아버지가 탄 수레를 끌고 가다가 너무 추워 손이 얼어버린 나머지 말고삐를 놓치자 아비가 그때서야 상황을 깨닫고 후처를 쫓아내려 하였다.

이에 민손이 아비의 소매를 붙잡고 울면서 사정하기를 어미가 있으면 자식 하나만 떨면 되지만 어미를 내쫓으면 세 자식이 추위에 떨게 될 것이라며 아비를 극구 말렸다. 이에 아비가 그의 말에 따랐고 계모 역시 그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되어 이후로는 아들들에게 모두 잘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小學」에도 실려 있어 조선 사대부에게 孝誠을 실천하는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길이 남게 되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다음의 예시로 드는 王祥의 경우는 다소 양상이 다르다. 그 역시 일찍 어미를 여의고 계모와 살았는데, 계모가 미워하여 아비에게 고자질하여 마구간을 치우게 할 정도로 구박을 받았다. 하지만 부모가 병들자 옷의 띠를 끄르지 않고 탕약을 받들어 미리 약맛을 보고 난 뒤에야 탕약을 올렸다. 그의 효성은 異蹟을 보여 부모에게 들릴 물고기가 얼음 속에서 튀어나오고 새고기가 먹고 싶다 하자 새들이 처마 밑으로 날아 들어올 정도였다고 한다.

「弘齋全書」에 보면 젊은 시절 정조도 역시 이런 왕상의 효도를 본받아 할아버지인 영조가 앓아누웠을 때 동궁으로서 7년간이나 옷에 띠를 풀고 침상에 누워본 적이 없다고 술회할 정도였으니 왕상의 효도는 조선유학의 구극적인 실천상이었던 셈이다. 정조는 또 이때 首醫 康命吉과 함께 「동의보감」을 강독하였으며, 이 역시 늙은 할아버지를 효도로 극진하게 모시기 위한 방편으로서 의학을 연구하였던 셈이니 국왕인 정조도 역시 일종의 儒醫라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효의 실천방안으로 나온 것이 다음과 같은 사례이다. 이른바 ‘孝子嘗糞’이라는 것인데, 庾黔婁라는 사람이 어느 고을에 원님으로 갔다가 열흘이 못되어 아비가 병들자 일을 그만 두고 곧장 집으로 돌아와 시봉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의원이 이르기를 병의 경중을 알고자 하거든 병자의 똥이 달고 쓴지를 맛보아야 한다고 하거늘 그가 아비의 대소변을 맛보니 점점 그 맛이 달고 끈끈해 지는지라 북두신에게 목숨을 빌어 금세 죽을 목숨을 달포를 더 지내게 하였다.

죽고 살고를 떠나서 지극한 효도를 강조하고자 실어놓은 예화이지만 고대 의약의 발전 단계에서 질병의 진단과 예후를 살피기 위해 병자의 대소변까지도 친족으로 하여금 맛보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시 큰 효도는 부모가 병든 다음에야 빛을 발하는 것인가. 오늘날 그 방법이야 따를 순 없다 하더라도 지극한 보살핌의 정신만은 되살려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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