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93] 쑥향이 묻어나는 民艸의 거친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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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93] 쑥향이 묻어나는 民艸의 거친 손길
  • 승인 2015.08.28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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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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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氏經驗方」

 
근래에 입수한 필사본 단방요법 책자 하나를 소개한다. 민초들의 기록이 으레 그렇듯이 제대로 된 모양이나 형식을 갖추는 경우가 드물다. 밀가루부대를 뒤집어서 표지로 재활용한 모습이 투박하다.
 

◇「한씨경험방」

전문은 모필 묵서로 썼지만 종이는 인쇄된 양면괘지를 사용하고 있어 아마도 일제강점기 말기 혹은 1950년대쯤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반부는 명리와 육효, 택일, 음택 등 잡방이 잔뜩 적혀있고 원형을 그려 상수를 배열하거나 운지법 등을 표시한 각종 도표들로 가득하다.

중반 이후에 약방들이 등장하는데, 中風當藥仙方이라는 화제가 첫머리에 적혀 있다.

인동, 계지, 남성, 천오, 부자, 세신, 오약, 마황, 천산갑, 초오 등 10가지 약재를 닭에 넣어 고아먹는 방법이다. 흥미로운 점은 병증이 전신에 걸쳐 있으면 닭 1마리를 통째로 쓰고 좌측에만 병이 왔으면 닭도 역시 좌편만 쓰고 반대로 우측에 풍이 들었으면 닭도 또한 우측 반마리만 쓴다는 점이다.

역시 중풍증에 있어서는 좌우 분변의 원칙이 매우 강력하게 적용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혈기를 大補하고 살이 찌면서 건강해지는 처방으로 ‘却病大補丸’을 실었다. 요즘에야 일부러 살찌우려하는 경우가 드물겠지만,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얼굴에 살이 붙고 풍채가 듬직해야 인물이 훤하고 사회에서 한자리할 만한 인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약쑥(藥艾)이나 혹은 보통 쑥(常艾) 7근을 대장간에서 쇠를 담금질하는 물 3동이를 넣고 달인 다음, 찌꺼기는 버리고 마늘 50뿌리와 씨를 뺀 대추 1되를 넣고 고아 단단해지거든 팥알크기로 환을 빚어, 공복이나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 3∼4차례씩 복용한다.

언젠가 필자가 통닭에 통마늘 반접 넣어 고아먹는 蒜鷄湯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비슷한 효과를 노린 전통 식치방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전문은 차서 없이 생각나는 대로 간단한 적응증을 상단에 쓰고 곧바로 간략한 처방을 그 아래 적어 놓았는데, 항목 상호간에 어떤 관련성을 갖고 있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약재명에는 대개 한자로 된 약명과 함께 한글로 향약명을 표기한 곳이 많아 이 책에 실린 내용이 오롯이 민간에서 전래되어온 간이 한약방들을 채록해 둔 것임을 짐작케 한다.

그래서인지 지역에서 통용하는 낯선 이름들도 눈에 띤다. 예컨대, 버리똥나무 蜂屎木, 오리나무 五柳木, 거지나무 榟木, 비렴 莧草, 호박씨지렴 南瓜仁油 등 민간에서 부르던 이름이 적혀있다.

대부분 향토색 짙은 사투리 발음으로 적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지방 어느 곳에서 살았던 촌로가 마을에 전해지는 갖가지 단방약초 치료법들을 구해 적어둔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은 기존의 전래지식을 채록한 것이다.

하지만 이따금 터무니없는 술법들이 끼어있어 수록한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긴 어렵다. 조상전래의 전통지식을 채록하여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할 급선무이며, 이것을 옥석을 가려 분간하고 필요에 따라 분류해서 유용한 것들을 분석하는 것 또한 금세기에 완수해야만 할 중대한 과업 가운데 하나임이 분명하다.

작성자는 본문 사이에 적힌 의약부를 앞표지에서는 ‘下篇藥部’라고 부제를 적었고 뒤표지에서는 「千病萬藥要覽」이라는 서제를 달아놓았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이 적힌 것으로 보아 아마도 여러 가지 잡다한 내용들을 두서없이 적다보니 갖가지 성격의 내용이 혼재되어 일관성을 잃었던 모양이다. 의약부 중간에 ‘韓氏經驗方’이란 자작서명이 들어 있어 필자는 이것을 근거로 소개 제목을 정하였다.

아울러 이 책에 실린 내용과 성격상 유사한 金海秀의 「萬病萬藥」(1930년)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비슷한 취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향약정신이 전승된 한 형태라 볼 수 있겠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사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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