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차례 한약분쟁, 고통의 현장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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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 한약분쟁, 고통의 현장 함께 있었다
  • 승인 2015.06.1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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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자 기자

박애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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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학신문 지령 1000호에 되짚어 보는 '그 때 그 사건'

약사의 한약조제 관련 약사법 시행규칙 공포로 분노 폭발
한의사-한의대생은 물론 한의사 가족-한의대생 부모도 참여

[민족의학신문=박애자 기자] 민족의학신문은 1989년 7월 15일 창간호를 냈다. 그 단초는 한방의료보험 수가 문제였다. 1984년 12월부터 청주·청원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해왔던 의료보험을 전면적으로 실시하면서 한방의료의 특수성은 무시한 채 의료수가를 터무니없게 낮게 책정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뜻 있는 한의사들이 모여 창간을 준비했다.

 ①한약분쟁 당시 열렸던 집회는 한의사들만 참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의대생을 비롯해 한 의사 가족, 한의대생 학부모까지 참여하는 범한의계 궐기대회였다. ②한의계는 한약분쟁 당시 대외적으로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상경집회를 열어 사회문제화시키는 한편, 내부적으로는 한의계 발전을 위한 공청회 등을 개최해 지속적으로 정책 개발 의지를 보여줬다. ③ 한의계 각종 현안을 알리기 위해 한의대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했다. ④당시 민족의학신문은 한의계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한의계 발전을 위한 토론회 등을 개최해 한의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⑤제2차 한약분쟁 당시 한의계는 삭발 투쟁을 했는데, 이 때 삭발에 참여한 한의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여한의사들도 삭발 투쟁에 동참했는데, 고은광순 한의사 역시 삭발을 통해 한의사들의 울분을 토해냈다.
물론 의보수가 문제 때문에 민족의학신문을 창간한 것은 아니었다. 민족의학신문을 창간한 가장 큰 계기는 당시 한의계가 처한 입장을 올바르게 대변해주고, 나아갈 길을 짚어줄 매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렇게 창간한 민족의학신문이 11일 1000호를 발행했다. 월간에서 격주로, 다시 주간으로 발행한 민족의학신문은 한의계의 굴곡의 역사와 함께 했다.

그 중에서 잊을 수 없는 일대의 사건이 ‘한약분쟁’이다. 한의계 부침의 분수령이 됐던 이 사건은 민족의학신문이 가까이서 한의계를 결속시킨 역할을 했던 사건이기도 하다. 그 순간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봤다.

한약분쟁은 한의계 10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로 당시 한의계와 약계의 대립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될 정도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약분쟁의 시발은 1993년 1월 30일 보건사회부가 입법예고한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1항 7조(재래식한약장 조문)를 삭제한다는 개정 법률안이었다.

당시 보사부는 ‘약국에는 재래식한약장 이외의 약장을 두어 이를 깨끗이 관리해야 한다’는 약사법 시행규칙 제11조 제1항 7호를 삭제해 사실상 약사의 한약조제를 허용하려 했다.
한의계와 약계는 약사의 한약 임의조제행위 문제를 두고 지속적으로 갈등해 왔지만 1993년 3월 15일 보사부의 일방적인 약사법 시행규칙 공포로 한의사들은 분노했다.

당시 전체 수입 중 한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80~90%에 이르는 한의사에게 유일한 근거 법률의 삭제는 생존권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로 인식됐다.

시행규칙 개정안이 입법예고 되자 한의계는 “약국의 재래식 한약장 철거 규정은 약국의 한약 임의조제를 금지해 의약질서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에서 입법된 것이므로 이를 삭제하는 것은 의약질서의 문란을 가져온다고 판단, 이 조항은 현행대로 존속시키고 약국내 재래식 한약장은 철거해 약사의 한약임의조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사부는 약사법 시행규칙을 공포했다.

결국 대한한의사협회는 1993년 3월 17일 제38회 정기총회에서 시행규칙 개정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집행부를 불신하고 회장 허창회, 부회장 서효석, 박순희로 새 집행부를 구성하고, 시행규칙 개정에 대한 헌법소원과 가처분신청을 고려하는 등 총력 저지에 나섰다.

내부적으로는 무기력한 집행부를 성토하고 약사의 한약조제 금지와 관련한 공청회를 개최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정부과천청사 앞에서 상경집회를 열어 사회문제화시켜 나갔다.

한의계는 약사의 한약조제 금지와 관련한 100만인 서명운동, 포스터, 현수막, 국민에게 드리는 글, 표어 등을 제작하고, KBS 여의도법정을 통해 자격이 없거나 혹은 실력이 없는 약사가 한약을 취급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한의계의 투쟁은 개원 한의사 뿐만 아니라 대학 교수, 한의대생, 한의사 가족, 한의대 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한의과대학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당시 보사부 장관이었던 안필준 장관을 고발했으며, 한의대생들은 약국의 한약조제 금지를 요구하며 수업거부에 들어갔다. 또한 5000여 한의사와 한의가족, 대한한약협회 회원, 전국한의과대학교수협의회 교수, 전국한의대학부모협의회 회원, 의료사고가족협의회 회원 등 1만여 명이 참여한 한의협 초유의 초대형 궐기대회를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한의사들의 투쟁 강도도 높아지면서 정부와 정치권은 분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장외투쟁을 장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약사법개정추진위원회를 설치해 치열한 논리싸움을 전개했다. 약사법개정추진위원회 설치 후 3달 만에 약사법 시안이 마련되고 ‘한약사’ 제도를 신설하기로 합의했다.

이와 함께, 약사가 무제한적으로 취급하던 한약조제 권한을 최소한의 검증을 거친 약사에 한해 과도적으로 한약을 취급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전문적 교육을 받은 한약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이 법은 1994년 1월 7일 공포됐다.

◇제2차 한약분쟁의 도화선은 엉터리로 치러진 한약조제약사시험이었다. 한의사들은 분노했고, 이를 항의하는 표시로 300여명의 한의사들이 삭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약분쟁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1995년 한약사 및 약사의 한약임의조제 범위를 정하는 한약조제지침서 범위를 놓고 한의계와 약계가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제2차 한약분쟁이 발발했다.

본격적인 제2차 한약분쟁은 1996년 제2회 한약조제약사시험(한조시)이 공고되면서부터다.

당초 한의계는 한조시 응시자격을 가진 약사가 2000명 안팎일 것으로 예상했으나 2만5000여명의 약사들이 한약조제 경력을 주장하며 응시하자 한의계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응시자가 대량 발생한데다가 시험문제 또한 예상문제집에서 베끼는 등 엉터리가 많아 대량합격이 불 보듯 뻔하자 출제에 참여한 한의대 교수들이 전부 퇴장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조시는 강행됐고, 그 결과, 응시자의 97%가 합격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한의계는 1996년 5월 3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한약조제약사 대량배출 음모 분쇄를 위한 전국한의사 비상총회를 개최, 항의집회와 300여 명의 한의사들이 삭발 투쟁을 감행했다. 이후 한의사들은 집회장소를 서울 시내의 조계사로 옮겨 무기한 단식 농성에 돌입하는 등 항의 집회는 지속됐다.

◇한약분쟁 당시 예비 한의사들인 한의대생들은 유급을 각오하고 수업 거부 등을 통해 약사의 한약조제 행위를 반대했다. 그 결과, 당시 한의대생들은 유급됐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전국한의대학부모협의회 회원들이 한강대교 아치 위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수천 한의사의 삭발과 목숨을 각오한 무기한 단식농성에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한약분쟁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은 불법 한약조제약사시험 고발 기자회견을 하기도 했다.

제2차한약분쟁에서 한의대생의 역할은 상당했다. 1995년 11월 24일 약대 내 한약학과 설치를 반대하면서 수업을 거부한 한의대생들은 집단유급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 3743명 중 2815명이 투표에 참가해 1673명(59.4%)이 찬성, 유급을 각오하고 약대 내 한약학과 설치 반대 투쟁이 나섰다. 한의대생의 투쟁은 이듬해 3월까지 지속됐다. 약대 내 한약학과 설치 반대 투쟁을 벌이던 한의대생들은 3월 19일 수업 복귀 찬반투표를 실시, 투표자 3315명 가운데 2119명(64%)이 수업복귀에 찬성함으로써 4월 말까지 시한부 수업 복귀를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대생들은 본과 4학년 649명을 포함, 4561명 모두 유급됐다. 한약분쟁의 후유증은 2003년 치러진 한의사 국가고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2003년 치러진 국시에 한약분쟁으로 대거 유급 당한 96학번 한의대생들이 지원함에 따라 제때 졸업하는 97학번까지 포함해 1000여명이 넘는 한의사가 한꺼번에 배출됐다.

수 년간 이어진 한약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다만, 한약분쟁으로 한의사들은 한의계의 사정을 국민에게 호소하는 계기가 됐다. 또 국민과 함께하는 한의학의 이미지를 구축했으며, 한의대의 위상도 제고했다.

◇제1차 한약분쟁은 약사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시작됐다. 한의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사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자 부산광역시한의사회를 비롯한 전국의 한의사들은 관광버스와 택시를 타고 상경, 정부 과천청사 앞에서 항의집회를 갖고 정부의 한약정책을 규탄했다.
특히, 국가가 지원하는 최초의 연구기관인 국립한의학연구소(한국한의학연구원 전신)를 설립했으며, 정부 내 한의약 전담부서가 국급으로 격상됐다. 또한, 한약사를 배출할 수 있는 한약학과를 설치하는 계기와 한방공중보건의사제도 도입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이와 함께 한의약발전기금 마련과 한의약육성법 제정을 추진하는 계기가 됐으며, 국립의료원 내 한방진료부를 설치해 한의학의 제도권 편입을 가속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학신문은 95년 9·6집회, 96년 5·3 집회, 조계사 농성 현장을 생생히 알리기 위해 직접 발로 뛰며 한의사들과 역사의 현장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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