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 647] 남북으로 절단된 離散良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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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 647] 남북으로 절단된 離散良方
  • 승인 2014.09.06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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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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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今良方集」②
여기서 이제 우리는 「고금양방집」을 지은 원작자 田光玉(1871~1945)의 이력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1904년 太醫院典醫 洪哲普의 건의와 고종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한의학교육기관 동제의학교가 설립되는데, 그는 청강 김영훈과 함께 가장 먼저 교수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헤이그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일제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킴에 따라 3년 만에 동제의학교는 폐교되었다.

◇「고금양방집」
이에 전광옥은 1905년에 결성한 八家一志會를 중심으로 趙炳瑾, 金永勳, 朴爀東, 張起學, 李喜豊, 徐丙琳, 李炳厚 등과 함께 사설강습소를 만들어 한의학 교육의 명맥을 이어나가고자 했다. 이들은 또 1909년 전국 규모의 한의사단체 대한의사총합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15년 이후 전광옥은 전선의회와 동서의학연구회 등 학술단체에서 강사로 활동하면서 한의학 교육에 힘썼다.

이와 같은 당시의 정황과 전광옥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김남일이 지은 「근현대 한의학인물실록」(들녘, 2011)에 잘 그려져 있는데, 1955년 발행한 「東洋醫藥」 제1권1호에 朴東浩가 기고한 ‘鳳岡 田光玉 선생을 추모함’이란 글을 통해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여기서 박동호는 함경북도에서 주최한 醫學講習會에 초빙된 전광옥의 강의를 듣고 감복되어 3년 동안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선생은 평소 성품이 온후하며 체격이 장대하여 겉모습에 위엄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찍이 사서삼경을 숙독하고 의서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諸書에 박통했고, 종교, 철학, 역사, 과학 등에도 두루 해박하였다고 한다. 특히 아침마다 十二段錦導引法을 운행하여 하루를 시작했고, 불교에도 조예가 깊어 화엄경과 같은 불경을 암송하곤 하였다. 의학에 있어서는 張景岳의 학설을 으뜸으로 여겨 경악학파로 꼽힌다.

한편 그의 저술로는 「醫學通俗法要義」와 「고금양방집」 2종류가 알려져 있는데, 앞서 박동호의 추모사에는 “선생님의 유고로서는 통속의학요의와 고금양방집 2책이 있었는데 6·25동란 때에 소실되어 남북이 절단된 今日엔 찾아 볼 길이 없으니 斯界一大遺憾이올시다”라고 적혀 있다. 이 책 「고금양방집」은 전광옥이 평생 갈고닦은 임상경험이 녹아 있는 학술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었지만 불행하게도 현재 원본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크나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동양의약」 제1권2호(1955)에서 역시 박동호는 ‘봉강 전광옥 선생의 遺傳, 經驗方抄集’이라는 글에 약간의 처방을 수록하여 그 일면모를 전했을 뿐이다. 또한 1959년 「東醫藥界」 10월호에는 전광옥의 유고 「고금양방집」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의 서두에는 유고집이 전래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此 良方集은 故 봉강 전광옥 선생의 유고이다. 봉강 선생은 단기 4204년 12월 22일 황해도 봉산 출생으로 왜정시대에 그의 의술이 높았고 한때는 조선 각도 醫生諸師로 지내신 일도 있다. 선생은 평생을 두고 고매하신 인격과 신묘한 의술로 우리 韓人의 醫界에서 떳떳이 자리하셨던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에 광명이 비쳐 올 단기 4278년 역사적인 해방을 맞이한 지 10일 만에 애석하게도 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어 “… 이제 선생의 고별 12주년을 맞이하여 선생의 各道醫生講師時 各弟子들의 경험방과 선생의 의방을 첨가하여 당시 집필하신 유고를 本誌에 연재키로 결정을 보았다. 본사의 영광으로 생각하며 故 봉강 선생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라고 적었다. 따라서 이 잡지에 실린 유고집의 경험이 인천한의사 학술연구회에서 공개되고 여러 회원들에게 강습된 것이며, 치유되지 않은 단절의 아픔 또한 여전하다.

안상우 / 한국한의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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