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서산책603「內醫院先生案」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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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서산책603「內醫院先生案」③
  • 승인 2013.10.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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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우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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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邦의 화타 편작을 기록한 文籍

그럼 이제 「내의선생안」이 이루어진 취지와 저술배경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아래는 1605년(선조 38년) 3월에 허준이 직접 지은 서문의 일부이다. “원의 이름을 ‘內醫’라고 하였으니, 곧 옛날 고려시대의 侍醫와 지금 明나라 조정의 太醫가 바로 이것이다. 局을 설치할 때 항상 임금에게서 가깝고 밀접한 곳에 두고, 실로 御藥을 조화하는 일을 맡고 있으니, 그 임무가 또한 무겁고 크지 않겠는가! 내의원에는 예로부터 「선생안」이 있어서 이름을 올린 자가 거의 수백 명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사라져버려 전하질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지금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기억이 그나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으니, 만약 지금 이 때에 다시 文籍에 기록하지 않는다면 우리 동방의 화타나 편작과 같은 명의들의 이름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 …”

◇ 「내의원선생안」

 

 


위의 글을 통해서 허준이 아직 「동의보감」의 편찬이 마무리되지 않고 언해의서도 간행하지 못할 시점인 1605년에 내의원 의관들의 인명록이자 내의원의 院誌와 함께 官署의 역사기록물인 선생안을 다시 집필한 것은 전쟁으로 손실된 내의원의 기능을 복구하고 아울러 관서의 역사와 선후의관들의 행적을 기록함으로써 고려왕조 이래 국왕과 至親을 보살피는 내의원 소속 내의들의 자긍심과 소명의식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이 우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허준의 의도는 이 기록물이 누대로 전승되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추록함으로써 바라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된다.

또한 이 선생안은 단순히 내의원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의술의 工拙을 논하는 포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기록물로서의 가치가 재삼 확인된다. 허준은 서문의 다음 단락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피력하고 있다.

“부족하지만 내가 (명의들의 사적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이에 감히 새로 「내의원선생안」을 마련하고, 그 성명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훗날 사람들이 반드시 그 이름을 지목하면서 의론하기를 ‘아무개는 실력이 뛰어나고, 아무개는 서툴다’고 할 것인데, 천년 후에 있을 공론을 두려워할만하니, 우리 당 사람들이여 힘쓸진저!”라고 맺음하였다. 하지만 실제 개개인의 인물이나 행적에 대한 공과나 포폄을 논한 평론이 실려 있진 않다. 다만 이러한 의식은 인조대에 간행된 「의림촬요」의 歷代醫學姓氏에 本國明醫가 추록됨으로써 다음 세대에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여기에 기록된 기재내용은 크게 보아 내의원 의관들의 성명과 자, 출생년을 표기한 인명부, 그리고 姓貫을 표기한 貫鄕地, 登科 시기와 入院 연대를 비롯하여 역임한 관직, 이력사항과 享年, 그리고 父祖曾을 기본으로 친가, 처가, 외가에 걸친 인적배경을 기재한 行歷항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본격적으로 세부기재사항이 드러나는 행력항의 기재 내역을 보면 비교적 다양한 내용들이 드러나는데, 연대가 위로 올라갈수록 최종직위 이외에 볼만한 기재내역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시기가 아래로 내려올수록 최종 직위나 품계로부터 父祖曾 직계와 처가, 외가에 이르기까지 한 인물을 중심으로 3族에 해당하는 가계 사항이 낱낱이 기재되어 있다. 직계의 경우에는 각각 성관을 생략하고 이름만 적었으며, 처족과 외가의 경우에는 본관과 성명을 모두 기재하여 혼동을 방지하였다. 처가의 경우에도 부조증을 모두 기재하였는데, 문무양반이 아니라도 기술직 중인 관료에 대한 철저한 인사검증 시스템이 작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신이 미천한 사람이 재능 하나만으로 출세하여 입신양명하는 일은 좀처럼 꿈꾸기 어려웠을 것이다.

안상우
한국한의학연구원
동의보감기념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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