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 특별인터뷰] 김석(나라한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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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 특별인터뷰] 김석(나라한의원 원장)
  • 승인 2003.07.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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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후 10년간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
신출귀몰한 전략·전술 입안


한약분쟁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명분에서 앞선 것도 있었지만 인적 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중 한 사람 꼽으라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김석(45) 원장을 든다. 그는 분쟁 당시 기획이사로서 신출귀몰한 아이디어로 대세를 한의사 편으로 뒤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약분쟁 이면에서 벌어졌던 숨막히는 아이디어싸움의 한 복판에서 그의 역할을 찾아보고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소재한 나라한의원을 찾았다.

다부진 입과 초롱초롱한 그의 눈망울에는 여전히 현실을 부단히 변화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러나 눈가의 잔잔한 주름은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본 기자는 상념에 젖어 있을 겨를도 없이 한약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중에서도 수많은 꾀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그의 대답은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전략가답게 허창회 회장의 지도력, 전략과 도덕성의 우위, 앞서간 정보화능력 등을 언급했다. 이중에서도 그의 ‘꾀’의 원천은 정보화능력이라고 밝혔다. 당시 보건의료계 중에서 전산망이 가장 발달한 한의협의 꼬마통신을 이용해 한의계 안과 밖의 상황을 일거수 일투족 뀄다고 한다.

실제로 포항제철보다 빨랐던 채팅기술은 실시간 대화를 가능케 해 당일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다. 대의명분이 좋고, 상황 자체가 한의사에게 유리하게 돌아갔지만 절대적인 힘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었던 내재적인 요인은 정보의 소통과 분석능력에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전략적으로도 ‘판은 커질수록 유리하다’는 상황분석에 따라 포인트를 약사가 아닌 정부에 맞췄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표면적인 갈등은 약사의 한약조제로 시작됐지만 우리는 즉각적인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과에 주목했어요. 그런 포인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지지를 얻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일하면서 위기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외줄타는 곡예의 연속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위기의 연속이었지만 그에게는 위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경실련 중재의 한약사제도 도입협상도 그에게는 수많은 일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저는 싸움을 즐겼어요. 아슬아슬한 사태가 좋았다고 할까요? 분명한 목표를 정해 해결해 나가는 것, 그 과정에서 부딪치는 내외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즐거움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는 차원이었기 때문에 사생활 전부를 쏟아넣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도 아쉬움은 남는다. 한의계가 국민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졸업 후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이나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 것, 정부 지원이 미흡한 것을 든다. 특히 분쟁 후 퇴진하면서 사무국을 한의협 회무의 주체로 세우지 못한 것은 큰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직원이 한의사의 하부구조가 되어서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행정과 제도는 사무국이 하고 한의사는 회비 내고 평가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자신이 한의협에서 나온 것도 한의사로서 더이상 할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분쟁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그는 의료시장이 새롭게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분쟁이 그에게 가져다 준 선물이었다. 의료가 전문화·대형화되는 추세를 보고 그 일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한의사의 독창적 컨텐츠를 사업화할 수 있는 지원법률이 정비되지 않았어요. 설령 기술이 있다해도 자금확보가 어려웠어요. 중소기업만 못한 자본 수준으로는 전문화와 대형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의계는 분쟁 후 10년간 근본적으로 변한 게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현재 무엇을 추구하는지 감이 잡힌다. 그것이 바로 특화다. 분쟁이 끝난 뒤로 그는 줄곧 이 일을 해왔다. 비만을 중심으로 토탈케어시스템을 구축하여 중국과 미국으로 본격 진출할 구상을 갖고 있다.

분쟁 당시 아이디어맨으로 한의사의 자존심을 지켜냈던 김석 원장. 그는 지금 분쟁의 연장선상에서 한의사로서 역할을 다하기 위해 그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 길이 한의계의 미래를 열어주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김승진 기자


■ ‘한약분쟁’ 용어 타당한가 ■

본지에서 창간특집으로 연재하고 있는 ‘한약분쟁, 그후 10년’이란 주제의 글에서 사용되는 ‘한약분쟁’이란 용어는 적당하지 않으므로 다른 용어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분쟁이란 용어는 사전적으로 “어떤 말썽 때문에 서로 시끄럽게 다투는 일”이라고 나와 있다. 따라서 한약분쟁이라는 명칭 속에는 ‘약사와 한의사 둘 다 나쁘다’거나 ‘밥그릇싸움’이라는 뉘앙스가 깔려 있어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태수(부산 성모한의원) 원장에 의해 제기됐다. 박 원장은 “용어 하나하나가 역사적 의미를 담아야 하는데도 아무런 고민없이 관성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의사 입장에서 적정한 명칭을 선정해서 그 의미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다시 5.18민중항쟁으로 변경된 사례를 거울삼아 한의계도 명칭 변경에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했다.

아울러 그는 “이대로 5~ 10년 흐르면 100처방 제한규정이 유명무실해지는 등 약사의 무분별한 한약취급이 고착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면서 “더 늦기 전에 역사적 평가작업을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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