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라는 단어, 전통의학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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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이라는 단어, 전통의학에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 승인 2013.07.1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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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우

김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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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ICTAM) 빛내는 석학들(6) 영국 옥스포드대학 의료인류학자 엘리자베스 수 (Elisabeth Hsu)

1999년 「The Transmission of Chinese Medicine」 발간

중국의학 전승되는 세 곳서 직접 체험하며 연구 시작

기공 통한 진료 현장-공식 중의학 체계 밖 경험 마다 안 해

인지인류학(cognitive anthropology)의 대가(大家) 블락(Bloch)은 ‘언어, 인류학, 그리고 인지과학(Language, anthropology, and cognitive science)’이라는 논문에서, 인류학자가 현지에서 알아가는 타문화의 내용들은, 언어적 수단보다는, 체험을 통해 많은 부분이 얻어진다고 단언한다.

현지에서 조우하는 문화의 구성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인류학적 데이터를 쌓아가지만, 그 문화에 대한 통찰은 결국 인류학자가 현지라는 시공간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몸의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블락의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는 인류학자들은 현지에서의 체험을 강조한다. 그리고, 또한 체험을 통한 앎을 자신들의 연구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미국사회의 마약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대도시 거리문화의 어두운 면을 체험하기 위해, 노숙인들과 함께 장기간의 거리 생활을 함께하는 하는 인류학자도 있으며(「Rightous Dopefiend」Bourgois & Schonberg (2009)), 히말라야 샤먼의 무속(巫俗)을 연구하기 위하여 샤먼의 제자가 되어 직접 신들리는 경험을 해보는 인류학자도 있다(「Body and Emotion」 Desjarlais (1992)).

◇「The Transmission of Chinese Medicine」, 「Innovation in Chinese Medicine」(위로부터)
장기간의 현지 체험을 통해서 쏟아내는 인류학 보고서[ethnography]는 인류학을 다른 학문 분야와 차별화시키는 깊이 있는 연구 결과물이 된다. 연구방법론으로서의 체험을 강조하는 인류학자들은, ‘체험, 삶의 현장’ 이상의 체험을 추구한다. 현지의 사회/문화/의료현상을 분석하는, 날카로운 인류학적 시선이 동반된 체험을 통해서 그 체험을 학문적으로 승화시킨다.

영국 옥스포드 대학 인류학과 교수인 엘리자베스 수(Elisabeth Hsu)는 이러한 체험의 방법론을 십분 활용하여 동아시아 의학을 연구한 학자이다.

1999년에 발간한 「더 트랜스미션 오브 차이니즈 메디슨」 (The Transmission of Chinese Medicine [중국의학의 전승])을 위해, 수는 중국 의학이 전승되는 세 곳의 현지에서 연구를 진행한다. 기공을 통한 진료가 전승되는 현장과 공식 중의학 체계 밖에서 진행되는 스승과 제자들의 중국의학 공부 모임, 그리고 공식화된 중의학 대학에서의 지식 전승이 그 세 현지이다. 체험을 통한 연구를 위해 수는 기공을 하는 스승의 제자가 되어서, 또한 공부모임의 회원이 되어서, 그리고 중의학 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하여, 중국의학 지식 전승의 순간, 순간을 직접 경험한다. 그리고 깊이 있는 직접 경험이 수반되지 않으면 근접할 수 없는 인류학적 통찰을 「The Transmission of Chinese Medicine」에서 쏟아 낸다.

기, 음양 등 동아시아 의학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조차도 의학지식 전승의 주체들, 장소, 그리고 배움의 방식에 따라서 다르게 사용되는 양태들을, 생생한 현장의 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기, 음양이라는 기본적 개념들조차도 어떤 사회적 조건(지식 전승의 장소) 속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와 의료적 함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사회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의학 개념들을 [“Concepts become socialized” (p. 225)] 드러내 보인다.

「The Transmission of Chinese Medicine」과 함께, 한의학의 입장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수의 학문적 작업은 「이노베이션 인 챠이니즈 메디슨」(Innovation in Chinese Medicine [중국의학의 혁신] (2001))이다. 중국의학을 연구한 의료인류학자, 의사학자들과 함께 쓴 이 책에서, 수는 중국의학의 역사에서 혁신적인 의술과 이론이 대두되는 순간들을 포착하고 있다. 수가 이 책을 통해 결국 말하고자하는 것은, ‘혁신’이라는 단어를 전통의학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통의학은 정체되어 있고, 과거에 머물러 있고, 변화와는 거리가 멀 거라는 고정관념을 깨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의사학적, 인류학적 자료를 통해서, 동아시아 의학은 계속되는 혁신을 통해 살아 움직이는 역동의 의학임을 보이고 있다. 혁신은 곧잘 과학기술과 연결된다. 하지만 그 연결은 과학기술을 상위의 개념으로 상정하고, 전통적인 것을 하위의 개념으로 위치 지우려는 근대 위계적 이분법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어떤 관념 틀의 결과물에 불과함을 「Innovation in Chinese Medicine」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전통의학이 근현대의 서양의학/과학에 비해 당연히 열등하다는 근대 이후의 위계질서 담론을 수는 깨고 싶은 것이다.

수의 책에서 핵심용어로 사용되고 있는 ‘혁신’은 지금 한국의 한의학을 돌아보게 한다. 한국의 한의학만큼 혁신이라는 말이 걸맞은 전통의학도 드물 것이다. 근대 이후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한의학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이 울혈진 곳이 한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수의 책 제목을 빌리자면, 「한의학의 혁신」이라는 책이 여러 권 출판되어야 할 전통의학이 한국의 한의학이다. 현대사회에서 대두되는 질병들에 대처하기 위한 수많은 연구자들과 임상가들의 고민들, 계속해서 제안되는 새로운 침법들, 한의학적 진단과 치료를 고민하는 수많은 임상학회들, 새롭게 등장하는 수기법들, 교정법들 등등, 한의학에는 혁신이라고 이를만한 의학적 내용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필자가 진행하고 있는 한의학에 대한 인류학적 현지조사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우리에게는 일상이 된 의료행위이지만 외국인들에게는 놀랄만한 일들이 한의학에는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9월 아시아전통의학대회(ICTAM)에 참가할 외국의 학자들에게도 한의학의 혁신을 위한 노력들은 매우 놀랍게 다가갈 것이다.

이러한 혁신의 노력들이 팽배해 있는 한의학의 현재를 보여줄 수 있도록 많은 발표들이 진행되었으면 한다. 한국 측 발표자들을 위해, 영어와 함께 한국어가 학회 공식 언어로 지정되어 있고, 한의학에 관심 많은 외국학자들을 위해서 동시통역 서비스도 제공된다고 한다. 이번 학회가 외국학자들에게 한의학의 ‘혁신’들을 선보일 귀한 기회가 되길 다시 한번 고대해 본다.

김태우
경희대 한의대 교수·의료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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