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ICTAM) 빛내는 석학들(4) 의료인류학계 거목 故 챨스 레슬리(Charles Leslie) 박사
상태바
▶9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ICTAM) 빛내는 석학들(4) 의료인류학계 거목 故 챨스 레슬리(Charles Leslie) 박사
  • 승인 2013.06.27 13: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우

김태우

mjmedi@http://


"아시아전통의학 연구는 근대 넘어선 새 시대의 증후”

필생의 화두는 ‘아시아’ 아시아 문명의 핵심적 내용 관점에서 봐
1976년 「Asian Medical Systems」출간 아시아전통의학을 학문분야로 자리매김한 역사적 저작물로 평가 받아

이름을 되뇌어 보면 가슴이 설레는 학자들이 있다. 편견을 거부하는 올곧은 관점, 통찰하는 혜안, 학문적 엄밀성을 평생토록 밀고나간 꼭 닮아 보고 싶은 학자들이 있다. 의료인류학자들 사이에는 챨스 레슬리(Charles Leslie)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세계적인 의료인류학자들이 그의 학문적 기여를 기념하는 헌정판 책을 출판할 정도로 [New Horizons in Medical Anthropology: Essays in Honour of Charles Leslie (의료인류학의 새 지평: 챨스 레슬리를 기리는 논문들), Lock & Nicher 2002], 레슬리는 의료인류학계의 큰 스승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에 참석하지 못한다. 이미 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슬리(1923-2009)를 빼고서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회를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작업들을 소개하는 글을 써 보고자 한다. 인도 아유르베다 의학을 전공한 미국의 인류학자 레슬리는 뉴욕대 (New York University), 델라웨어 주립대(University of Delaware)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학자들에게는 화두가 있다. 평생 동안 물고 있는 놓칠 수 없는 질문들이 있다. 레슬리의 저작들을 읽어 보면 ‘아시아’가 그의 중요한 화두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가 출판한 전통의학 연구의 필독서 두 권의 제목 자체에서 아시아라는 화두가 드러난다. 「아시안 메디컬 시스템즈 (아시아 의학 전통들), Asian Medical Systems: A Comparative Studies」와 「패스 투 아시안 메디컬 날리지 (아시아 의학 지식을 향한 길) Paths to Asian Medical Knowledge」가 그것이다. Asian Medical Systems의 1976년 출판은 아시아전통의학이 흥미로운 연구분야임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Asian Medical Systems: A Comparative Studies」(위)

아시아의 각 의학전통 전문가들과 함께 엮은 이 책은 아랍의학, 인도와 스리랑카의 아유르베다, 일본, 대만, 홍콩, 중국의 동아시아의학 등이 각각의 사회에서 존재하는 방식, 서양의학과 관계 맺는 방식을 비교연구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아시아전통의학을 하나의 학문분야로 자리매김하는데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이번 9월 산청에서 열리는 ICTAM을 개최하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회가 성립되는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레슬리가 바라보는 아시아 의학전통은 그 스케일이 원대하다. 그는 아시아의학전통을, 아시아 문명의 핵심적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전통의학은 그 전통의학이 존재하는 문명의 사고방식, 세계관 등을 체화한 문명의 의학적 꽃핌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시아 의학전통에 대한 연구는 아시아문명에 대한 연구에 다름 아니며, 이 연구를 통해서 아시아 문명들 간의 비교연구는 물론 서구문명과의 비교연구도 가능하다는 것이 레슬리의 생각이다. 아시아 전통의학의 연구는 그리하여 문명사의 중요한 창이며 인류문화를 조망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연구 사이트(site)인 것이다.

 

◇「Paths to Asian Medical Knowledge」

캐나다 맥길대의 알렌 영 (Allan Young) 교수와 함께 엮은 「Paths to Asian Medical Knowledge」에서는 아시아전통의학에 대한 연구가 근대라는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증후라고 레슬리는 단언한다. 과학으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 인식론에 대한 회의가 아시아전통의학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의 대두는 어떤 [시대적] 전환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p. 4), 과학적 사고가 최상의 가치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상대주의는 각각의 사회, 문화, 그리고 그 문화의 지식들 간에 위계적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는 과학도 서구근대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에게 인상 지워져 있는 지고지순한 진리로서의 “과학적 지식은 다른 종류의 지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p. 4) 것이다.

 

레슬리의 책들은 당대 한국의 한의학을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도 한의학이 가진 인류문화사적 가치를 생각하게 한다. 레슬리의 주장처럼 아시아전통의학연구를 통해서 인류문명에 대한 의미 있는 연구가 가능하다면, 근대화의 극심한 변화의 와중에서도 어떤 아시아전통의학보다도 탄탄하게 자리를 잡고 있는, 한국의 한의학이 가장 고무적인 연구 사이트일 것이다. 물론 한의학은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서양의학의 전세계적 헤게모니 장악 이후, 전통의학은 한 번도 위기 상황이 아닌 적이 없었다. 모든 전통의학들은 근·현대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며 지금도 그런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들이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 전통의학이 한의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의 수많은 전통들이 근·현대가 요구하는 값비싼 통과세를 지불하지 못하고 변형, 사멸된 것을 생각할 때, 동아시아 의학전통을 근·현대라는 시대에 제대로 가져오기 위한 뛰어난 연구자, 임상가들의 에너지가 어느 전통의학보다도 팽배해 있는 당대 한국의 한의학은, 인류문화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의학이 전통의학연구를 위한 훌륭한 사이트라는 것은 국외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레슬리의 책에서도 홍콩, 대만, 일본, 중국의 동아시아의학에 대한 연구들은 한 챕터 이상의 분량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한의학에 대한 언급은 거의 전무하다.

이번 9월, 전통의학을 연구하는 세계적인 학자들이 대거 내한하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ICTAM)가 한의학의 진면목을 알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한의학의 다양한 학술유파들과 연구자들의 논문발표, 새로운 치료법에 대한 소개, 임상시연, 그리고 임상현장에 대한 투어가 예정되어 있는 국제아시아전통의학대회의 흥미로운 일정들을 소화하면서, 놀라운 표정이 가시지 않을 국외 참석자들의 얼굴을 상상해 본다.

김태우 / 경희대 한의대 교수·의료인류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