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입자물리학에 길을 묻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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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입자물리학에 길을 묻다 (3)
  • 승인 2013.06.0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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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재

배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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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한의학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의학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모델의 집합이니만큼 그 모델을 떠받들고 있는 논리가 어느 수준의 내적 및 외적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는가가 궁극적으로는 한의학이라는 학문의 효용성을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따라서 입자물리학자들이 반례 등장, 새로운 모델 제시, 실험적 검증의 과정을 되풀이하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앞으로의 한의학 이론 발전 방향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고전 한의학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혹은 고전 한의학 이론을 반박하는 사례 등이 발견될 때 한의학자가 취해야 할 태도는 첫째로 기존 한의학적 이론을 수정 보완하거나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여 이미 알려진 현상 뿐 아니라 새롭게 발견된 현상까지 설명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고, 둘째로 합리적이고 구체적이며 계량적인 방법으로 이를 증명하고, 셋째로 추후 후배제현이 발견할 새로운 반례를 통해 자신의 이론이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지난 세기 내내 치열하게 논쟁해왔던 ‘한의학의 과학화’의 구체는 오직 이것이라고 감히 주장하겠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지금까지 한의계의 전반적 학문적 흐름을 돌이켜보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다. 먼저 임상의에 의한 학술적 시도 가운데 다수가 충분한 논리적 엄격성을 통해 새로운 이론 자체의 내적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하였으며, 더욱이 잘 설계된 실험을 통해 해당 이론을 계량적으로 검증하고 학계의 평가를 받고자 하는 시도가 결여되어 있거나 심지어는 그런 시도 자체를 부정하기도 하였다. Case series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자료에 기반해 ‘새로운 치료법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시도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한편, 위의 주장은 동시에 ‘한의학의 과학화’라는 명제가 일각에서 이해하는 바인 ‘한의학의 서양과학화’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과학은 ‘이제까지 아무도 반증하지 못한 확고한 경험적 사실을 근거로 한 보편성과 객관성이 인정되는 지식의 체계’일 뿐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어떠해야 한다고 규정된 바는 없다. 화학식이면 어떻고, 기미론이면 어떻겠는가.

관건은 그 언어로 풀어낸 논리 체계가 내적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가, 실험적으로 증명 가능한가, 반증 가능한 명제인가, 이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한의학을 과학화 하면 한의학이 아니라는 주장은 과학에 대한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뜸 치료 했더니 태아의 역위가 교정 되었다든가 (JAMA 1998;280(18):1580-4), 침 치료 했더니 만성 통증이 개선되었다든가 (Arch Intern Med. 2012;172 (19):1444-53.) 하는 연구들은 충분히 과학적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이른바 ‘양방적’인가? PPQ (Phlegm Pattern Questionnaire)로 담음 진단된 환자의 두통이 그렇지 않은 환자의 두통과 임상양상과 자연경과가 어떻게, 얼마나 다른지를 통계적으로 증명하면 이것이 ‘한의학의 정체성을 훼손’하는가? 십전대보탕 열수 추출물에서 전분 및 당류를 제거해서 양을 줄여도 기존 십전대보탕 열수 추출물과 동일한 효능을 보임을 증명하면 그 결과물은 한약이 아닌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의학의 과학화란,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보던 고전 한의서를 모두 불사르고, 한의원의 훈민정음 벽지를 모두 찢어버리고, 입고 있던 개량한복 진료복을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어설픈 생물학적 지식과 낯선 화학명에 천착하면서 정체성이 모호한 의학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여전히 환자를 평가하고 치료하고 예후를 판단하는데 있어 고전 한의학은 매우 효과적인 도구이며, 이를 무턱대고 폐기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 글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과학화의 핵심은 내적 및 외적 타당성과 반증 가능성이다. 이런 노력들을 바탕으로 가장 최신의 한의학적 지식이 가장 진리에 근접한 것이기를 도모하는 것이 한의학의 과학화일 뿐이다.

근대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 이상 이어져 내려온 연구와 토의들을 바탕으로 하여, 합리성과 실증성을 통한 한의학의 과학적 발전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한의학 이론은 이미 지난 수 천년 간 시대에 따라 변해온 설명 도구일 뿐 결코 한의학의 정체성도 본질도 아니다. 한의학은 과거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존해야 하는 무형문화재가 아니라, 인류 건강 증진을 목적으로 창조적인 계승과 발전을 달성해야 할 현재 진행형의 학문이다. 한의계 내에 이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한의학의 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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