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학술대회다운 학술대회는 찾아볼 수가 없다. 다수의 주제별 학술발표가 동시에 진행되고 수백 장의 포스터가 학회장을 가득 메우는, 그런 행사가 있어야 할 텐데, 고작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 구두 발표 몇 건 하고 끝내버리는 행사가 대부분이다. 사실 이들 학회에 참여하는 인원이라고 하면 이곳 민족의학신문이나 한의신문에 실리는 각 학회의 ‘인증샷’에 서 있는 그 사람들이 거의 전부다.
필자는 지금껏 이어지는 공중파 방송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며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 종종 놀라곤 했다. 발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유물이 다양한 해석과 함께 방송에 소개될 때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저런 밀도 있는 영상물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이는 여전히 내게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한편으로는 매년 열리는 역사학대회에 수천 명이 몰리는 것을(지금도 최소 1천 명은 모인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런 역량을 표출할 수 있었던 데는 평소 역사학계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이 든든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역사학대회만큼 큰 행사는 아니지만 매년 두 번씩 열리는 의공학회의 학술대회도 많은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교수나 대학원생뿐만 아니라 현직 엔지니어와 학부생까지 참여하여 행사장을 가득 메우고 활발히 관심사를 공유하는 모습을 보면 이 분야의 학문이 ‘살아있다’는 것을 그야말로 생생하게 느끼게 된다.
언제까지 부러움만을 느끼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리도 한 번 해 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한의학 전공자들의 개인적 역량이 결코 작지 않음을 고려한다면, 그 답은 최소한의 참여 인원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분과학회 구성원으로는 무리다.
때문에 필자는 기초한의학 분과학회 전체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기초한의학 학술대회’를 제안하고자 한다. 기초한의학 분야의 학술대회라면 학부생도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으며 고학년이라면 의미 있는 학술적 성과를 발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국의 한의대생이 함께하는 대규모의 행사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과거 한의대 학부생의 중요한 행사였으나 근래에 파행을 면치 못하고 있는 행림제(杏林祭)의 한 행사로서 기초한의학 학술대회를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학술대회는 한의계의 학술 풍토를 진작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한의 분과학회의 영세한 재정 상황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며 분과 학회원 사이의 상호 관심과 교류를 넓힘으로써 현재 학술지 평가에서 자주 지적되고 있는 과도한 자기인용(동일 학회지 내 인용) 문제를 개선하는 데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따금씩 펼쳐보는 사진 자료 중에, 1915년 한의계로서는 지극히 어려운 시절에 열렸던 ‘전선의생대회(全鮮醫生大會)’의 사진이 있다. 화면에 수백명의 인물이 빽빽이 앉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770여명이 모였다고 한다. 선배들이 모였던 그 시기보다 우리는 훨씬 좋은 시절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학부생을 포함하여 한의계 전체의 학술 역량을 결집할 정례적 행사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