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동의보감」 400주년, 무엇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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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 「동의보감」 400주년, 무엇을 남길 것인가
  • 승인 2013.04.0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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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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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올해는 「동의보감」이 간행된 지 400년이 되는 해다. 이 때를 맞아 갖가지 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 경남 산청에서는 세계전통의약엑스포를 준비하고 있고 한의학연구원은 신동의보감(新東醫寶鑑)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다. 공중파 방송에서는 ‘구암 허준’이 방영되어 세간의 이목을 모으고 있다. 이 밖에 각 지자체와 여러 학술 단체에서 준비하는 행사들을 합하면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만한 많은 행사가 올해를 즈음하여 치러지는 것 같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올해가 지나가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밀레니엄 버그를 들먹이며 호들갑을 떨다가 그저 평범한 한 해로 지나가 버린 지난 2000년도처럼, 쇠락해 가는 전시장만 덩그러니 남긴 채 동의보감 400주년의 해도 그렇게 지나가 버리지는 않을까.

여기서 잠시 필자는, 근 10년간 학교와 신세대 한의사를 중심으로 한의계에 작지 않은 이슈가 되었던 근거중심의학(EBM)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아마 공감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요즘은 한의사들도 입만 열면 ‘근거가 무엇인가’, ‘논문이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근거중심의학이 한의학을 과학화, 학문화하는 첨병인 듯하고, 이에 뒤처지면 한의학이 살아남지 못할 것만 같다. 하지만 서양의학계에서 근거중심의학이 대두된 데에는, 그들이 수 백년 동안 구축한 거시, 미시 구조의 탐구에 근거한 탄탄한 연역적 설명 방식의 끝에서 귀납적 방법을 조금 보완하고자 한 배경이 깔려있다. 한의학은 한 번도 현대 수준의 연역적 설명 방식을 획득한 적이 없었다.

물론 고서에는 연역적인 듯한 설명 체계가 많이 보이지만 그것은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 ‘이론과 실제는 다르다’는 무책임한 변명으로 쉽게 얼버무려지는 사후 해석 체계 내지는 가변적 상징의 체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근거중심의학을 한의학에 도입하는 것은 왠지 순서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과거의 치료법이 진짜로 ‘듣는가’를 밝히는 것보다 새로운 인체 탐구와 치료법을 제시할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은 기존 요법의 효과와 문제를 가려내고 일부 한의 이론의 실증 기반을 확보하는 데는 기여하겠지만 한의학에 지속가능한 지식생산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필자는 확신한다. 지금 한의학계엔 근거중심의학의 바람이 거세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하지만 그렇게 근거중심의학의 열풍이 지나간 한의학계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기억에는 한 때의 시대적 분위기로만 남겠지만, 근거중심의학의 유행 전후 한의계의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적어도 탁상공론을 떠나 실증적 기반을 강조하는 학문 분위기가 한의학의 여러 영역에 자연스레 자리잡는, 그러한 성과는 분명히 남을 것이다.

갖가지 화려한 행사로 「동의보감」 400주년을 치를 한의계도 올해를 기준으로 무엇인가 변모되는 것이 있었으면 한다. 필자의 생각에 한의계에 「동의보감」이 오래도록 던질 수 있는 가치는 한국 한의학이 갖는 보편 의학의 기반을 일깨우는 것이다. 한국의학사 전공자들로부터는 적지 않은 반론이 예상되나, 「동의보감」은 한국 고유의 의학을 만들고자 지어진 책이 아니며, 허준 선생이 접할 수 있었던 당시의 모든 의학 자료들을 잘 정리한(이론 영역, 즉 인체 탐구 영역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임상적 질병 단위 중심으로 최대한의 정합성을 갖추어 정리한) 책이다.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지만 「동의보감」의 체계는 지금도 한의대의 임상교과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차제에 이들이 새로운 보편적 전통의학의 체계로 재편되었으면 한다. 구호에 그칠 민족의학, 한국 한의학이 아니라 허준 선생이 진정으로 구축하고자 했던, 당대의 모든 의학 지식을 집대성한 보편적 의학 교과서의 체계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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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2013-04-09 12:52:09
늦었지만, 오자가 있어 정정합니다: 「동의보감」이 오래도록 던질 수 있는 가치 있는 → 「동의보감」이 오래도록 던질 수 있는 가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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