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맞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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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를 보내고 새 시대를 맞는다는 것
  • 승인 2013.03.14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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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운

정창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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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위키칼럼 & 메타블로그

 

정 창 운
생각의 무덤 / 근거중심의 한방진료확립에 관심이 많은 초보 한의사
(http:blog.naver.com/lunarmix)

고(故) 노무현 대통령은 구시대의 막차가 되기를 바란 대통령이었다. 그의 5년간에 대해서 누군가는 공을, 누군가는 과를 논하고 싶겠지만, 적어도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는 누구나 공감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안타까운 실패와 뒤이은 끝없는 퇴행의 나날들을 보자면, 그가 바란 ‘구시대의 막차’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한의학’ 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건 대학에 입학한 후이고, 그 이전의 삶에서 한의학은 내 인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제와서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거지만, 한의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믿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입시점수와 현실에 떠밀려 억지로 손을 대게 된 것이다. 그 한구석에는 물질에 대한 욕심도 있었던 것도 있다. 하여간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왔다. 그렇게 그렇게 스스로의 의지없이 밀려만 가다보니 어느덧 한의학을 믿지 않는 한의사가 되어있는 나를 보게 됐다. 이런 한심한 한의사가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대학시절 단 한번도 잡아보지 않았던 침을 이렇다 할 준비없이 나타난 환자에게 처음으로 놓으면서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기도 했고, 진료가이드를 보고 증상에 맞게 쓰여 있는 그대로 한약을 환자 손에 쥐어주면서 그렇게 떳떳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내가 정말 한 환자를 대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하는 물음. 애시당초, 이것이 무슨 희극이란 말인가? 하지만 지금까지 이유야 어쨌건 주워온 것들을 전부 버리기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처음에 한번 발을 내딛는 것이 어렵지,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길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문득 무언가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는 일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있는, 영혼없는 행위들이 도대체가 어떤 배경 위에 서 있는지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히 실망스럽기만 했다. 소위 근거중심의학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 출판되어 있는 한의학 관련 연구들은 상당수가 형편없다거나, 비과학적이라거나, 체계가 없다거나, 의미가 없다거나, 결과가 부정적이거나… 한 것들이었다. 아는 것 없이 하나하나 알아나가면서, 늘어가는 것은 한탄뿐이었다. 차라리 알지 말 것을, 현실은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상황이 좋지가 않았다. 결과가 없을 거라면, 처음부터 하지 말 것을 그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자료들을 읽고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한의사들이 지금까지 해온, 하고 있는 진료들이 생각보다는 탄탄한 근거 위에 서 있다는 것. 한의계에서 주목하고 있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과학계에 한의학에 대한 긍정적 신호가 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 한의사들이 그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멀리했을 뿐이지 그것들은 원래 그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란 것처럼….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생물학, 기초의학과 임상한의학은 기초한의학의 매개 없이도 충분히 맞물려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한의학에서 가장 껄끄러운 부분, 누군가에게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지워도 되는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알리고 싶었다. 누군가도 같이 보아주기를 바랬다.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어쩌면 아주 가까운 시기에 ‘한의학적’이라는 딱지를 ‘한의학’에서 완전히 지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한의학 없는 한의학을 만드는 것, 그것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 아닐까?

수년 전 명망이 높은 한 교수님께서 양방의학계에서 이뤄지는 예방접종이 해롭다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발표하셨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문헌을 들어가며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한의사들은 지금도 소수지만 남아있는 것 같다. 양방에서 하고 있는 것이니 그 자체가 해악이라고 보는 한의사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미 인두(人痘)법은 중세기에 중국 등 동아시아권 의학에 널리 전파되어 있는 질병 예방치료였으며, 근세에 발전한 종두법을 한국에 들여온 지석영 선생님이 한의사였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그런 주장에는 심한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존의 의학적인 분석을 통해서도 접종의 불필요함이나 무용함, 혹은 해로움을 밝혀낸 바 있다. 실제 독감백신의 경우, 접종을 받는 100명 중의 1명만이 독감에 걸리지 않는 혜택을 본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가장 탄탄한 증거이다. 어린이나 노인에 있어서 그 효과는 입증된 바 없다. 게다가 100명 중의 1명이라는 수치조차 제약회사들의 연구 조작으로 인해 부풀려진 수치라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증거에 기반하여 불필요한 양방의사들의 의료행위로 낭비되는 시간과 비용을 지적하는 한의사는 없는 것일까? 얼마든지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한 문제제기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백신에 대해 반대하는 한의사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들,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다고 하기 힘든 자료들 뿐이라 한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신뢰만을 추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 일각에선 영구기관을 개발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애시당초 운동 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끊임없이 그 법칙에 도전을 하고, 마치 자신만은 그 법칙을 깰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있는 경우를 본다. 그런데, 이러한 말도 안되는 기관들이 공학적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효율이 높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것들의 목표가 비과학적인 ‘영구기관’이 아니라 ‘좀 더 효율적인 기관’이라고 하면 될 것을 끝끝내 영구기관을 만들겠다고 하며 그 성과마저 사장시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의사들의 모습은 어떠할까 돌이켜 본다.

이 글을 쓰면서 마치 어느 크레타인 스스로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라 외치는 것처럼, 나 역시도 한의학을 하면서 ‘한의학은 거짓말이다’ 외쳐야 하는 모순을 보며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구시대의 막차가 된다는 것은 이런 부조리함을 알면서도 시대의 방향을 돌려놓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이다. ‘너는 얼마나 깨끗하냐? 너의 진료는 얼마나 정상적이냐’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침묵을 할 수밖에 없다. 나의 진료 역시 내가 내세우는 기준에 만족하는 것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구시대의 막차로서, ‘아닌’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것, ‘맞는’것들로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 ‘맞는’것인지 기준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한의사와 양의사간 면허 일원화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는 즈음이라 의료 현실도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하다. 후배 한의사들이 ‘선배들이 이렇게나 엉터리였다’ 배꼽을 잡고 웃을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시대가 바뀐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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