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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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늑대의 시간
  • 승인 2013.03.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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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호

김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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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위키칼럼 & 메타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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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MBC에서 방영되어 히트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저는 TV, 특히 드라마를 즐기지 않기 때문에 그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태국과 한국을 왔다갔다하며 조직폭력배의 배신과 복수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던 것으로 대략 기억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드라마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 저 드라마의 제목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프랑스어로, 하루 두번 빛과 어둠이 바뀌는 시간, 즉 이른 새벽과 늦은 오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물의 윤곽이 흐려지고 따라서 줄어든 정보 때문에 나의 판단 기준이 정확하게 서지 않아서, 저기서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것이 내가 집에서 기르는 친근한 개인지, 아니면 나를 물어뜯으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대를 뜻합니다.

뭐, 이를 빛과 어둠, 꿈과 현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시공간적 경계를 나누는, 뭔가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제3의 시공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개와 늑대의 시간을 바로 연구 아이디어가 반짝이고, 초기 구체화 작업을 한 후, 바로 연구 중복성 검사를 할 때 많이 느낍니다.

엄청난 논문 서지 데이터베이스에서 키워드를 사용하며 기존 연구된 논문들을 검색할 때, 검색된 논문이 과연 나의 논지를 받쳐줄 훌륭한 개로서 역할을 해 줄지, 아니면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먼저 논문을 발표해서 나의 아이디어를 무용지물로 만들 늑대일지…. 정말 논문 본문을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매 번 느끼는 저 공포감과 안도, 그리고 절망….

저는 그래서 이 중복성 검사의 시간이야말로 바로 연구자의 개와 늑대의 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통 연구실에서 오랜 시간 동안 연구해온 소재에는 이미 연구동향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이 없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로 연구에 접근할 때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연구동향을 파악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 한달 내내 개와 늑대의 시간이었습니다. 아주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 한의학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론에 대해 열광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케팅과 산업의 이유로 약간은 과장(?)되어 전해지는 Big Data의 데이터마이닝(Data Mining)이나, 지네틱스, 지노믹스, 프로테오믹스, 메타볼로믹스 등이 한의학과 결합하여 뭔가 한의학을 증명(?)하거나 새로운 지식체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들을 많이 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러한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저도 완전히 동의를 하고 있으며, 적절한 수준의 연구들이 이루어진다면 분명 한층 발전한 한의학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교실에서도 데이터마이닝과 관련한 학술논문을 높은 수준의 국제저널에 퍼블리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한의학계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매력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한의학에 달려드는 외부 스터디 그룹의 의도를 반드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기존 과학의 방법론 측면에서 넘지 못할 벽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이상향 또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한의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은 측면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목적인 칼같이 정확한 질병의 진단과 골드 스탠다드, 그리고 결국은 유물론적 설명을 원하는 욕망들을 위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한의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학술적 명예를 위해 깃발을 꽂기 위해 한의학을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한의학의 정체성인 정체관념과 변증론치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거나 혹은 피상적인 채로 한의학의 데이터를 해석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의학을 소재로 한 연구 중에서, 임상연구가 아닌 다른 연구들에서는 그 결과의 해석이 비교적 자유로운 편인데, 이 경우에 소중한 데이터는 실컷 제공해주고, 결국은 한의학의 진의와는 거리가 먼 상태로 해석당하는 거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 당하는 것입니다. 천연물신약에 대한 문제도 이런 부분에서 시작한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위험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연구 그룹이든 반드시 한의사가 포함되어 있어야 하며, 특히 단순히 데이터를 제공하는 역할로서가 아니라 실험을 설계하고 연구를 주도하는 역할을 해야합니다. 그냥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데이터 제공하고 나서 ‘음… 한의학적으로는 이런 의미가 있죠’ 정도의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방법론이라고 해서 ‘저 사람들이 잘 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직접 방법론을 배우고, 익혀서 다른 연구자들이 내어놓지 못하는 한의사만의 통찰을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의학 연구자에 대한 충분한 교육과 투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한의학이라는 미개척지에 새로운 도구를 가지고 달려드는 이 시대의 흐름에서, 한의학의 진의를 보존하며 우리들이 주도적으로 우리의 한의학을 창조적으로 계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입니다.

어스름이 깔리고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되기 시작하면, 늑대에게 물어뜯길 수도 있지만 자신의 개라고 생각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도, 내가 키우는 충견을 늑대라고 생각하고 먼저 몽둥이를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어스름 속에서 개와 늑대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냉정한 통찰과 비판적인 관찰, 그리고 그것을 위한 꾸준한 노력과 연구입니다. 많이 연마해야 할 듯합니다.

바야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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