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한의학! 한글로 할 것인가, 한자로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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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한의학! 한글로 할 것인가, 한자로 할 것인가
  • 승인 2012.06.1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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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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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왕
한의학을 연구, 교육하고 표현하기 위한 문자로서 한글과 한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현대 한의학의 오랜 논제다. 본 시평에 할애된 좁은 지면으로 이 문제를 논하는 것이 무리한 일일 수 있겠으나 그간의 논의에서 주목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조금 풀어 보고자 한다.

교육분야로 논의를 한정한다면, 한의학 교육에 한자가 필수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꼽는 한자 존치(存置)의 이유는 과거를 배우기 위해 한자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의학을 깊이 있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의학의 과거를 잘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의학을 이해하기 위해 한자를 알아야만 한다고 하면 문제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한자 없이는 우리 학문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학문이 아직도 우리 것으로 소화되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내 이공계 대학원의 발표 수업 자리에서는 자기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영어 단어들을 그대로 전하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발표의 위기(!)를 넘기는 예를 무수히 볼 수 있는데, 현재의 한의학을 이해하는 데 한자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결국 이처럼 ‘용어의 진짜 의미는 아무도 모른 채 다 알았다 간주하고 넘어가는’ 집단적 부정직을 용인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한자의 외피 속에 감추어진 모호한 한의학 개념들을 모두 쉽고 명료한 우리말로 표현해 내는 것은 한시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한자는 과거를 알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일까? 나는 한의학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서도 한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자는 다른 문자가 갖지 못한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자는 큰 함축성을 가지고 있고(때로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 편리하다.

반면 영어는 조어력이 크지 않아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 위해 종종 원래 표현의 이니셜을 축약한 약어를 만드는데(SAR, ANOVA, HASSP, SENSE 등등), 이렇게 만들어진 표현들은 그 뜻을 짐작할 수 없어 비지식인층을 소외시키고 조어의 체계성을 기할 수 없으며 때로는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적절한 한자 조합으로 만들어진 새 용어는 단어의 길이도 짧고 다른 용어들과 체계적 관계를 형성하기 쉬우며, 처음 그 용어를 들은 사람도 어느 정도 뜻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한자는 어떤 글자보다도 인간의 시각능력을 많이 활용하는 문자라 할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을 다 적을 수는 없지만 이러한 한자의 장점이 미래의 한의학을 만들어 가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한의학을 현대의학과 다른 학문으로 만들어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한자는 한의학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서도 필요한 존재다.

그런데 이렇게 한자의 사용을 권하면 거북함 내지 반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반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거두절미하고 결론만 말하자면, 문자에 관한 지식이 차별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은 굳이 한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지식이 있는 곳에서는 늘 발생하는 문제였다. 지식이 있는 자들을 그 지식을 무기로 삼아 그들만의 동아리, 소위 전문가 집단을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다.
영어든 한자든 역사 교육이든, 대중교육에 무엇인가를 첨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 지식을 통해 또 다른 지식권력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따라서 한의학 연구의 영역에서 한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안을 강구하되 한의학의 교육과 홍보에는 반대로 한자를 최대한 줄여갈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런데…, 미래가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진짜 걱정스런 점은, “薦腸關節의 可動性이 向上된다”는 표기에는 반감을 느끼면서 “sacro-iliac joint의 stability가 increase된다”는 표현에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는 작금의 이율배반적 세태다.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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