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한약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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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한약의 범위
  • 승인 2012.06.07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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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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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윤 경

이제 한의사들은 더 이상 허준이 살던 조선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최근 100년간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었으며, 의료계 또한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닥터진이라는 드라마에서 조선시대로 돌아간 주인공에 의해 괴질-콜레라에 부적으로 대처하는 조선시대의 의사가 나왔는데, 의사들이 서양 봉건왕조시대의 의사나 이발사들과 다른 것처럼 한의사들도 조선시대의 의사들과 다르다. 아마 조선시대의 어의보다 지금의 평범한 한의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의학과 한의학을 막론하고-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한의사는 현대인으로서 현대과학과 의학의 상식을 모두 갖고 있으며, 의학기초과목을 한의대에서 모두 배운다. 물론 한의학이 조선시대에 집필된 「동의보감」이라는 서적의 내용을 아직도 실제 임상에 사용하고 있기는 하다.

이는 400년 전에 집필된 책을 변화 없이 답습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동의보감」이 그 당시 어명에 의해서 간행된, 당시의 의학을 집대성한, 정부기관에서 편찬한, 공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서적으로서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의 내용을 임상에 참고한다고 해서 한의사들이 조선시대의 의학을 그대로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동의보감」 이후에도 한의학은 계속 발전해 왔다.

체질맞춤의학을 처음 제창한 동무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독창적인 침법으로 임상에서 좋은 효과를 내고 있는 사암침법, 서양의학의 도입에 영향을 받아 시작되어 발달한 어혈론, 최근 들어 학문적 이론과 제조법이 발전한 약침/봉침, 전통적인 침법을 현대적으로 재발견하여 활용하고 있는 침도법 등 조선시대에 없었던 한의학적인 이론과 치료법들이 즐비하다. 한의학은 움직이고 있고, 변화·발전하고 있다.

한약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한의사들이 과거의 의서에 적혀있는 대로만 약을 쓰는 것은 아니다. 「상한론」을 쓴 장중경 선생은 숙지황이라는 약재를 쓰지 않았다. 그 당시 생지황을 숙지황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경 선생이 생진하는 효능으로 쓴 인삼도 산삼이었을 것이다. 인삼재배기술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 선생도 지금 한의사들이 당귀나 대황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놀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수입되거나 재배되지 않아 대용으로 참당귀나 종대황을 썼으니 참 한약 쓰기 좋다고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최근에도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약재들이 사용되고 있다. 아프리카 기원의 악마의 발톱이란 약재도 들어와 한약재로서 ‘천수근’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에는 많이 쓰이지 않은 은행잎도 ‘백과엽’이라는 이름의 약재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한약재의 범위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환자를 치료하는데 효과를 보이는 약재라면 무엇이든지 도입해서 사용하였던 것이다. 본초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듯이 「신농본초경」에는 365종의 약재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송나라 때의 「정화본초」에는 1천748종이 수록되어 있었으며, 현대의 「중약대사전」에는 5천767품목이 있다.

처방도 마찬가지이다. 「황제내경」에는 단지 13수의 처방이 적혀있었지만, 「상한론」과 「금궤요략」에는 375수로 늘어났으며, 송대 「태평성혜방」에는 1만 6천834수, 명대의 「보제방」에는 6만 1천739수가 적혀있다. 현대의 「방제대사전」에는 10만 개에 가까운 처방이 적혀있다.

우리시대에서 이 숫자들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아야 하는가? 무슨 이유로? 우리가 과거의 의서에 적혀있는 약재와 처방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한의학을 오해하고 있는 외부의 잘못된 생각이다.

서양의 약재는 생약이고 한약재가 아니라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생약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한약재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일본에서는 인삼도 생약이고, 당귀도 생약이다. 일본에서 서양의 천연자원(우리의 표현으로 한약재, 일본에서는 생약)과 여기에서 추출하여 사용되는 의약품들을 연구하는 학문인 Pharmacognosy를 생약학으로 번역하였고, 이 명칭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들어왔다.

일본은 이미 메이지유신 때 한의사제도를 말살시켰으므로 문제가 없지만, 우리는 의학과 한의학이 분리되어 있으므로 혼란이 생겼다. 이 용어를 우리나 중국이 먼저 번역했다면 본초학으로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한약재와 생약은 같은 용어이다. 공식적으로도 나누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한약전」이나 「한약규격집」에 547종의 약재가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기원의 것과 한약재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구분 없이 같이 포함되어 있다.

처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현대에 새롭게 개발된 배합의 처방은 천연물신약이고, 한약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이다. 현대의 한의사들은 지금도 진료실에서 매일 새로운 처방을 개발하고 있다. 고전의 처방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환자에게 더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면 약재를 가감하여 새로운 처방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다.

그런데 자생한방병원에서 쓰던 한약처방이 의약품 허가과정을 거쳐 제약회사에서 제조되면 전문의약품인 천연물신약이 되어 한의사가 사용할 수 없는가? 약리학적 효능자료를 제출했기 때문에? 병원에서 임상시험을 했기 때문에?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전국의 12개 한의과대학과 3개 한약학과, 2만 명의 한의사와 2천 명의 한약사가 한의약의 현대화, 과학화, 근거창출을 위해 현대적인 연구방법론을 이용해 약리학적 효능과 임상결과를 입증하려 노력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나라가 천연물신약을 제약산업의 돌파구로 삼고 있다면, 더더욱 그럴 리는 없다. 천연물신약이 부작용이 적으며 수천 년에 걸친 경험에 의해 효과가 증명된 전통적 처방이 존재하고 있어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됐다는 장점이 있어 성공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면, 지금도 계속 축적되고 있는 한의사들의 경험이 충분히 존중되고, 제약화 되어 피해가 없으며, 활성화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한의사들이 효과를 본 새로운 처방을 제약화 하여 한의계와 제약업계가 윈-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이 처방들이 양지로 나와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의약도 현대의 학문으로서 현대사회의 일원으로 충분히 역할을 할 수 있고, 또한 하고 있다. 현대적인 방법으로 개발된 한약을 한의사가 쓰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의 프레임으로만 한의약을 보지 말아 달라.

김 윤 경
원광대 한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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