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이제 실체를 말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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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이제 실체를 말해야 할 때
  • 승인 2012.05.17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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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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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김 기 왕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한의학이 서구의 과학과 본격적으로 조우한 지도 이제 한 세기가 훌쩍 지났다. 다른 전통 학문과 달리 한의학은 그간 자신의 생명력을 잘 지켜왔지만, 그 내부에서는 적지 않은 변형이 있었다.
그렇게 변형된 부분 가운데 오늘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의 학문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다. 한의학의 학문적 대상이라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주된 부분은 장부, 경락, 정, 신, 기, 혈, 진, 액과 같은 인체 구성 요소와 六淫 등의 외생 인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흔히 알려진 바와 달리, 고인들은 이들이 실체가 없는 무엇, 즉 순수한 기능적 단위라거나 비물질적인 무엇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비록 깊이 있는 탐구를 한 것은 아니나 인체에 대한 실체적 접근 즉 해부 역시 고인들의 생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일례로 송대에 두 차례에 걸쳐 행해진 官 주도의 인체 해부는 종래 생리학설의 수정을 추동하였는데, 대소장 연결 부위에서 수분이 분리된다는 소위 ‘闌門分水說’은 이때의 인체 해부에 의해 대두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구의 과학이 밀려들면서 어떤 사람들은 한의학의 무결성을 지키고자 변형된 해석을 제시한다. “내경의 오장은 혈육의 오장이 아니다”는 운철초(惲鐵樵, 1875-1935)의 해석은 그러한 대응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장부, 경락 등을 실체로 해석할 경우 이와 관련된 종래의 학설은 단번에 부정되므로 많은 사람들이 실체 개념을 포기하고 얼마간 현대과학과 양립 가능할 듯한 추상적 단위로서 한의학의 주요 개념들을 해석하는 전략을 취하였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전략은 한의학 교과서의 곳곳에서 그 뼈대를 이루고 있다. 교과서의 어디를 보아도 경락이나 경혈의 실체가 무엇인지 찾을 수가 없다. 진위 판단과는 거리가 먼, 원전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긴 설명이나, 뻔한 상식적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한, 내용 없는 설명들이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러한 전략은 당분간 한의학 이론의 진리성 시비를 잠재우는 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한의학을 스스로 성장 가능한 학문으로 진화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의 한의학 이론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선결과제가 있다.
첫째는 고인들이 장부, 경락 등에 대해 가지고 있던 具象的 생각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고인들에게 경락은 線이었는지, 管이었는지, 관이었다면 衛氣의 관이었는지 혈액의 관이었는지 명확하게 밝혀 기술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 그들의 생각은 대부분 ‘잘못된’ 생각이었음이 분명해질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진위판단을 유보할 제3의 대안으로 후퇴해서는 결코 안 된다.

둘째는 실체에 기반한 한의학 이론 개념의 재정의다. 이는 한의학의 신장을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및 성선으로 이루어지는 내분비시스템으로 해석하는 식의 접근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의학의 진단이나 치료과정에서 명백하게 관찰 가능한 실체적 요소들(병소, 치료 도구 등)이 해당 개념과 연결되는 다수의 방식을 가장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 개념을 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우선은 다소 장황하게 기술될 가능성이 크지만, 이처럼 실체에 기초한 정의를 하지 않는 한 현대 학문이 누리는 다양한 방법론의 도움, 풍부하고도 자연스런 學際的 연구의 혜택을 받을 길은 요원할 것이고, 한의학이 현재의 상태에서 한 발 자국 앞으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21세기다. 현대인의 목소리가 담긴 새 교재, 실체와의 충돌을 두려워 않는 새로운 한의학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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