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바리캉과 초음파진단기기, 그리고 ‘산업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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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바리캉과 초음파진단기기, 그리고 ‘산업표준’
  • 승인 2012.03.0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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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효

김재효

mjmedi@http://


몇 해 전 산업기술평가원에서 의료기기개발 R&D 평가위원으로 활동할 때 담당자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한의사가 의료 활동을 함에 있어서 현대 의료기기 사용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는 현실을 미처 몰랐다”며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는 ‘바리캉 논쟁’이 연상된다면서 한의계가 관련 산업의 분류와 함께 산업표준을 만들어 가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함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바리캉 논쟁’은 무엇일까? 2004년 이발사들은 미용사들이 사용하는 전동식 ‘바리캉’(헤어클리퍼)의 사용문제를 놓고 이발소와 미용실의 업무영역을 볼 때 미용실에서 ‘바리캉’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보건복지부에 탄원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보건복지부는 공중위생관리법을 근거로 ‘이용업은 머리카락을 깎거나 다듬는 행위인 반면, 미용업은 머리 등을 손질하는 행위’라며, 따라서 머리카락을 깎거나 다듬는 데는 전동식 바리캉을 사용해도 되지만, 다듬는 데는 가위만 사용하라는 해석으로 결론이 내려져 이발사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을 ‘바리캉 논쟁’으로 불렸다.

이 논쟁은 지금도 이용업과 미용업 사이에서 진행 중이다. 그러나 해당 분야의 현실을 보면 논쟁은 이미 결론이 난 듯하다. 그 이유는 2004년 이후 이발소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반면 미용실은 급격히 발전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바리캉 논쟁을 불러일으킨 ‘헤어클리퍼’는 미용실에서 제한 없이 사용하는 현실을 볼 수 있다.

당시 바리캉 논쟁은 분명 이용사들에게 손을 들어준 보건복지부의 판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현실은 그 반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 담장자의 말에 힌트가 있다. 바로 ‘관련 산업의 분류와 산업표준’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도구였던 수동식 바리캉은 점차 기술력이 발달하면서 전동식 헤어클리퍼가 발명되고, 관련 기술 발달과 제품 생산이 이뤄지면서 새로운 전동식 헤어클리퍼로 대체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내 이·미용시장에서 이 도구에 대한 구매력이 가장 컸던 쪽은 아무래도 미용업계였지 않을까.

당시 이발소는 약 2만 4천여 곳인 반면, 미용실은 8만여 곳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관련 업체들은 헤어클리퍼가 머리카락을 깎는 도구뿐만 아닌 다듬는 도구로써 미용업계가 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관련 산업의 규격을 마련해 갔는데, 그 대표적인 접근 방법이 ‘산업분류’와 ‘산업표준’을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산업분류’와 ‘산업표준’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한국산업표준(KS, Korean Industrial Standards)’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독자들도 예전이나 지금 상품을 구매하는데 ‘KS’ 표시가 있다면 대부분 신뢰하지 않는가. 이처럼 산업화된 자유시장경제 속에서 자율적이며 무한경쟁의 복잡한 관계가 형성되는데, 공급자의 선의 경쟁과 소비자의 올바른 선택을 얻게끔 만들어진 제도가 ‘표준산업분류’와 ‘산업표준’이란 잣대이다.

우리나라도 1964년 ‘한국표준산업분류’가 제정된 이후 국내의 산업구조 및 기술변화를 반영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개정되어 왔으며, 그에 따라 KS가 제·개정되어 왔다.(http://www.standard.go.kr/) 그런데 이는 당시 산업과 기술 상황을 반영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수많은 기업들이 유무형의 제품 개발, 생산과 판매의 범위를 분류함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간접적인 저작권 및 법적 보호에 이용되어 왔으며, 나아가 국가차원에서 해당 자료를 근거로 관련 산업의 비전을 예견하고 육성을 도모하는 것으로도 이 분류를 이용한다는 점이다.

‘바리캉 논쟁’에서 ‘표준산업분류’와 ‘산업표준’을 언급하는 것이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 미용업이 바리캉의 사용제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모든 미용실에서 헤어클리퍼를 볼 수 있는 현실은 이런 ‘산업표준’의 분류와 제도를 관련 산업체가 활용하였다고 한다면 독자들에게 “Believe or not”일까?

한편 통계청(http://kostat.go.kr)의 한국표준산업분류 자료를 참고해 보자. 요즘 한의계에 핫이슈가 된 ‘초음파영상진단기제조’를 살펴보면, “내과, 외과, 치과용의 전기 및 전자식 진단장치, 신체기능 검사 및 생리적 변화를 검사하는 기기, 자외선 또는 적외선을 응용한 기기를 제조하는 산업활동을 말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만약 ‘한의’라는 단어 하나가 여기에 삽입되었다면 국면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한의계와 관련한 ‘한국표준산업분류’의 현실은 어떠할까? 우리와 관련된 각종 키워드를 통해 제반 한의학 분야에 관련된 산업의 분류와 설명을 찾아보면서, 한의계 주변 산업의 현실은 그야말로 황무지에 가깝다. 한의사가 원하는 의료기기 사용권한을 관련 산업과 업체들을 통해 옹호받지 못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즉 한의사를 위한 관련 산업이 현재까지 거의 없으며, 현재의 상태라면 앞으로 육성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제 한의계는 남의 이야기 같던 ‘바리캉 논쟁’을 다시 떠올려 봐야 할 것이다. 지난해 개정된 한의약육성법의 조항은 전통의약기술과 과학기술을 접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한의사의 정당한 의료환경의 개선과 현실화는 한의계 내부를 넘어 국내 한의약기술 관련 산업체의 육성과 한의계 프랜들리 기업의 등장과 성장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한의약 표준산업이 한의사의 의료영역만큼 늘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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