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한의학, 역사를 뛰어넘어야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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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한의학, 역사를 뛰어넘어야 살 수 있다
  • 승인 2012.01.1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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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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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왕(부산대 한의전 교수)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공자는 죽었다, …… 고로 인간은 죽는다.”

많은 이들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귀납추리의 한 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추리의 결론을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죽는다는 우리의 생각이 단지 이처럼 많은 사망 사례를 헤아려 봄으로써 얻어진 것일까? 지금까지 지구상에 탄생한 인구의 총수는 추정 방법에 따라 300억으로부터 1200억 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하지만 이 중 70억 명, 즉 적게 잡아도 5% 이상은 현재 ‘죽지 않았다.’

만약 어떤 차의 브레이크가 5%의 비율로, 그러니까 스무 번에 한 번 꼴로 제동에 실패한다면 우리는 그 차의 브레이크를 밟을 때 결코 차가 멈출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이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귀납적 판단으로 보이는 결론에도 실은 여러 보조 가정과 연역적 사유가 관계하고 있다는 것이며, 둘째 현대라는 시대가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여타의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라는 것이다.

전자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상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하나 후자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설명할 부분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이후,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인구에 관한 한 현대를 결코 다른 시대와 동질적이라 생각할 수 없도록 한다.

그런데 이처럼 특정 시대가 갖는 비동질성은 인구 문제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한의학의 역사가 장구하며 그러한 긴 역사를 통해 충분히 믿고 의지할 만한 경험적 정보가 축적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장중경이나 이동원, 허준과 같은 과거의 명의들은 과연 오늘날의 한의사나 중의사보다 많은 환자를 보았을까? 개인적 비교를 떠나 19세기까지 동아시아 의학이 치료해 낸 인구와 20세기 이후 동아시아 의학이 치료해 낸 인구 사이에 과연 큰 차이가 있을까? 「내경」 이후 2천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으니 고인들이 우리보다 20배 이상의 증례를 축적했을까?

이러한 양적인 비교를 넘어 정보를 다루는 방법의 변화는 20세기 한 세기의 변화가 2천년을 압도할 만큼 더욱 압축적인 면이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의 유산이란 것도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거대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의학계는 한편으로 역사의 무게를 과신하고, 한편으로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새로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한의학이 관찰하는 사실과 사실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정리해야 할 때인데, 여전히 원전에 수록된 도식과 문구로 이들을 사후 해석하는 데 만족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과거의 한의학에서 물려받아야 할 것이 있었고 물려받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물려받아야 할 것은 고인들이 관찰한 사실과 그들의 진료 방법이며, 물려받지 말았어야 한 것은 그들이 원리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언어의 힘에 매료되어 이를 원리인 듯 묘사하였지만 현대의 학문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인과율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한의학계는 고인들이 원리라고 여겼던 것을 한의기초이론으로 탈바꿈시켜 기초 교과목으로 만들어 두었다. 당연히 한의학 이론의 변화는 너무나도 더뎠다. 아니, 변화할 필요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되먹임되는 것이 없으니. 이래서는 지속가능한 학문을 만드는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

한의학의 역사는 길다. 하지만 남겨진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해야 할 만큼 큰 무게를 갖는 것은 아니다. 유구한 문화유산, 이를 넘어서야 한의학이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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