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는 약방기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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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녀는 약방기생이었을까?
  • 승인 2010.06.0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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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영

홍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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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약‧구급의학 저변 확대 ‘첨병’
교차로- 의녀는 약방기생이었을까? 

의녀는 야누스다. 전문가로 발돋움했지만 기녀의 꼬리표를 달았다. 의녀는 괄호 속 존재이다. 천인이자 여성이기에 기록에서 소외되어 있다. 세계 의학사에 유래 없는 제도이건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애매한 평가를 받아왔다.

의녀제도는 의료시혜의 확대라는 측면도 있지만, 의학의 저변을 넓히려는 취지에서 전략적으로 시행되었다. 향약의서들이나 구급방 종류의 서적들이 의학 저변 확대의 도구였다면, 지역의 의생이나 의녀들은 이를 실현하는 첨병이다. 의녀의 주 고객은 여성이지만, 의학지식은 남녀를 불문하고 백성들에게 고루 미쳤다.

의녀는 여의로서 왕실 여성에서 기층여성까지 담당했다. 의녀의 기녀 역할이 극치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연산군 대에서조차 “(기녀인) 흥청들을 잘 치료하지 않으면 의녀를 벌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의녀의 정체성이 다시 흔들리게 된 시기는 19세기 중반 이후다. 사회적 혼란과 정국 불안정으로 왕실 안팎에서 본업보다는 기업에 열중했다. 사회적 가치 혼돈 속에 ‘막장 드라마’가 유행하는 풍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들만으로 500년 의녀의 역사를 일반화시켜서는 곤란하다.

혼란기 때 본업보다 기업 열중
향약‧구급의학 저변 확대 ‘첨병’

혜민서 시절 불려다니며 술자리에 앉았다가 관원이나 혜민서 교수와 눈이 맞았던 의녀가 있었다면, 명의들이 넘치는 왕실에서 침통을 들고 활보하며 의관들의 자문을 받았던 의녀가 있었다. 서울에서 내의녀로 근무하며 양반가 부인의 병까지 보아주던 의녀가 있었다면, 촌에서 향약과 구급지식을 전파하고 침술을 펼친 의녀가 있었다.

치과나 안과, 외과, 산과와 같은 전문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들은 사대부가에서 다투어 데려갈 정도로 인기가 많아 큰 재산을 모았다. 엘리트 과정을 밟아 왕실 차비대령의녀로 승진하기도 했다. 실력을 인정받으면 평생 급료를 받으며 안정을 누렸다. 왕실 진료에서 공을 세울 경우, 가장 큰 소원인 면천을 이룰 수도 있었다.

남자들과의 접촉이 많은 직업 특성 상 정상적 결혼생활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의녀는 엄격한 사회에서 독특하게 살았다. 왕실 진료 보조자, 양반여성 주치의, 약방기생과 같은 면면은 여러 얼굴 중 일부일 뿐이다. 역사기록에서 비켜 있지만, 우리 의학 저변인 향약과 구급의학에서 의녀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관비 중 유일하게 어깨에 힘주고 다녔던 의녀는 비록 괄호 속에서나마 전통의료의 성격을 의미심장하게 보여준다.

홍세영/ 한국전통의학史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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