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한의학의 정체성은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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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한의학의 정체성은 없는 것인가?
  • 승인 2009.09.1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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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열

이충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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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의 정체성은 없는 것인가?

지금의 한의학 연구, 교육에 대한 정체성 비판이 거듭되면서 일부에서는 이런 논의 자체를 불편해 하고 있다. 도대체 한의학의 정체성이 무엇이기에 자꾸 정체성, 정체성 하는 거냐라는 반응도 있고, 또 한의학의 정체성이란 변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지금 조선시대로 돌아가자는 거냐라는 반응도 있다.

한의학의 정체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정체성(identity)은 동일성으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인식이자, 타자들로부터 자기를 구별해내는 자기 식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런 자기 인식과 식별은 한 개체나 존재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만의 고유한 본질적 속성들(attributes)을 의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한의학의 정체성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 관점에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역사적 관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들은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한의학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의 한의학은 전통시대 한의학과 비교할 때 크게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의 한의학이 많은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한의학으로서의 본질적 속성들을 유지하고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또 하나는 한의학을 둘러 싼 인접 학문과의 관계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한의학은 현재 생의학(서양의학), 보완대체의학, 중의학, 한방의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한의학만의 고유한 특성은 무엇이고 지금 이 분야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다. 외국에 가면 흔히 당하는 한의학은 중의학과 어떻게 다릅니까와 같은 질문들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의학의 정체성에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할 수 없는 본질적 정체성이 있고, 한의학을 둘러 싼 ‘타자’들이 바뀜으로 인해 시대에 따라 새롭게 구성되는 구성적 정체성이 있다. 우리 선조들은 ‘東醫’라는 이름을 통해 우리 의학을 중국의학과 구별했다. 또 1930년대 조헌영은 <통속한의학원론>에서 한의학과 서양의학을 “종합치료 의술과 국소처치 의술, 자연치료 의술과 인공치료 의술, 조직의학과 현상의학, 정체의학과 동체의학, 치본의학과 치표의학, 방어의술과 양생의술, 내과의학과 외과의학, 획일주의와 응변주의, 귀족의술과 평민의술, 관용의술과 민용의술”로 대비시켰다. 구성적 정체성의 사례들이다. 한의학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 선배들은 이를 통해 우리 의학의 주체성을 확립하려 했고, 한의학의 존폐 위기 속에서 한의학만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여 한의학을 지키려고 했다.

지금의 한의학 정체성 위기는 한의학 속으로 많은 새로운 지식들이 유입된 것에 기인한다. 서양의학 지식이 들어왔고, 보완대체의학, 그리고 중의학, 일본 한방의학 지식까지 한의학 속에 들어 왔다. 이 지식들로 인해 한의학에 다양성(diversity)이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한의학은 이 지식들에 대해 하나의 체계로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지식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 융합되지 못하고 각기 따로 놀면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정체성 인식은 한의학이 ‘자기’, 곧 주체성을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한의학이 정체성 위기에 빠져있는 것은 이런 모든 지식들을 ‘자기’라는 주체적 입장을 가지고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KCD의 사용과 함께 서양의학 지식과 체계는 우리의 교육과 임상 속으로 더 깊이 들어 올 것이다. 중의학 서적이 한의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고 중의학 지식이 교과서의 한의학 파트를 점령하는 일도 계속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금 ‘한의학’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그걸 묻고 있는 것이 한의학의 정체성 질문이다.

이충열/경원대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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