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료봉사기(3)-김규만(서울 굿모닝한의원)
상태바
네팔의료봉사기(3)-김규만(서울 굿모닝한의원)
  • 승인 2003.03.18 15: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webmaster@http://


네팔 奧地서 펼친 이동진료의 매력과 보람

사진설명-팍팅지역에서 트레킹 진료하는 모습.

이것도 인연이다!

쿰중의 시커먼 흑토는 가나안 땅을 연상하는 쿰부 지역에서 젖과 꿀물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다. 전날 치료한 70세의 까미도마 할머니네 집에서 아침 식사 초대를 받았다. 영어가 능숙한 이 할머니의 아들이 고소 세르파라고 한다. 안방에는 아들이 오스트리아 팀과 정상 등정을 한 사진이 걸려있다. 눈물을 질질 흘리고 눈곱이 낀다는 할머니를 다시 치료해줬다.

아침 식사로 나온 밀가루 전에 야크버터와 칠리를 싸서 먹었다. 창(탁주)도 내어 온다. 不敢請 固所願이다. 아이들 장갑과 엑기스 약제를 선물로 주고 나와서 쿰중에 예티(雪人)의 머리가 보관되었다는 곰파로 갔다. 여기에 약간 헌금을 하니 예티의 두개골을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91년 대구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대 세르파의 사다였던 앙체링의 집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승을 떠나고 어머니만 있었다. 그 어머니는 백내장으로 눈이 안보인다고 해서 정명혈에 침을 놔주고 나를 안내했던 젊은 엄마에게 침을 발침케 했다. 갈 길이 먼 나그네와 치료가 절실한 환자의 타협이었다.

우리는 서둘러 에베레스트를 초등한 에드먼드 힐라리卿의 도움으로 세운 쿰중 힐라리학교로 갔다. 교무실에는 힐라리의 사진이 붙어있다. 쿰중학교에 우리는 아이들이 충분히 복용할 수 있는 구충제와 장갑을 기증했다.

이제 쿰중을 떠나노라. 쿰중의 쵸르텐(고승의 뼈나 책을 봉안한 티벳양식의 탑)의 ‘진실의 눈’이 우리가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쿰중에서 상보체 가는 길은 아주 길다란 마니웰이 형성돼 있다. 기도문을 새긴 수많은 석판을 양쪽으로 겹겹이 쌓아 담을 이루고 있다. 이런 祈願 때문인지 쿰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 ‘진실의 눈’이 품어내는 성스러움을 이야기하곤 한다.

길을 내려갈 때는 올라갈 때를 생각하라. 오르는 것은 길고 내려가는 것은 짧다. 인생도 그러하다. 인생 반 고개를 넘으니 얼마나 속도가 빠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내리막을 천천히 내려가고 싶다. 이것이 인생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남체에서 진료를 포기하고 서둘러 팍딩으로 가기로 했다.

논스톱으로 걸어 도착하니 이미 10여명의 환자가 기다리고 있다. 밖에는 점점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다. 진료를 시작하니 비닐 우비를 입은 단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단원들이 도착하는 대로 진료에 속속 참가하니 점차 속도가 빨라진다.

이런 의료봉사 캠프를 하다보면 제일 아쉬운 것이 치료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치가 안되더라도 치료받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이런 트레킹 진료 같이 계속 움직이는 상황이므로 未完成에 익숙해야 한다. 미완성 뿐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수시로 생기므로 不確實性에 대해서도 능숙해야 한다. 미완성과 불확실성은 우리 인생 그 자체이다.

오늘 꼬마 환자가 많이 있었다. 작지만 단단한 이 꼬마들은 울거나 겁을 먹는 아이가 한 명도 없었다. 천식, 기침, 가래, 두통, 현훈, 소화불량, 복통 등이 많았고 피부소양증과 종기 부스럼도 제법 많았다. 오늘밤도 창을 한 통 준비시켜 비 소리를 안주 삼아 마셨다. 롯지를 휘감아 도는 물소리는 연암의 熱河日記의 강물소리를 연상시킨다. 이 강물 소리는 雨雷같다. 詩心이 발동한다. 내가 醉仙인가?

아듀 트레킹, 아듀 타시델릭

다음날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루크라로 출발했다. 루크라 공항 철조망을 따라 내려가 중간쯤에 있는 넓고 둥근 홀이 있는 롯지에 짐을 풀었다.

우리는 포터들과 헤어지는 환송파티를 가졌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전하고 창을 준비해서 마시고 그들과 손에 손을 맞잡고 페치카를 중심으로 돌면서 네팔노래를 합창하면서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눴다.

중앙에 장작난로는 불타고 오디오에서는 네팔 민요 ‘레샴피리리’가 흘러나온다. 제3세계 소수민족의 종교 의식처럼 그렇게 우리는 불 주위를 돌며 소리를 질러댔다. 통행금지 전에 기념촬영을 하고 보냈다. 아듀, 타시델릭(감사합니다)! 그들이 떠나면서 트레킹 진료의 대단원의 막도 내렸다.

그 동안 정지됐거나 거꾸로 흘러가던 시간이 문명사회로 돌아가면서 다시 정상적으로 흘러간다. 오늘 날짜가 9월 27일이다. 밤새 퍼붓던 비가 그치고 먼 곳 하늘이 밝다. 아침식사를 하고 루크라 공항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 올랐다. 잠시 후 카투만두 공항에 무사히 안착한다. 일단 호텔에 가서 Check-in하고 점심은 후배 유배상의 게스트하우스에 가서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끝내니 힘이 난다.

식사를 끝내고 버스에 오르니 KONECO의 정사장님 일행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침을 맞으러 호텔로 오겠단다. 나머지 사람들은 쇼핑을 가고 나는 호텔로 돌아갔다. 어차피 오후에 티미市에 있는 환자 왕진도 있고 해서 김영현, 김용 원장, KBS 제 3지대 김태형, 편만열PD가 함께 남았다. 이 사람들을 치료하고 그 분들 차를 타고 티미市 경희친선병원까지 간 다음 엠블런스를 타고 환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카투만두로

참 지저분한 동네이지만 오랜 역사를 느끼게 한다. 힌두신을 모신 사당이 아주 많다. 이들의 종교와 생활을 느끼게 한다. 치매에 하반신 마비 할머니가 이전 보다 좀 나아 보인다. 방도 조금 치워져 있어서 악취는 좀 덜하다. 약간씩 호전은 보였지만 예수의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가 간다고 하니 정신이 없어 보이던 할머니가 손을 흔들어 준다. 그 할머니는 우리가 치료해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 것일까? 뇌성마비 환자는 많이 호전된 것 같다. 오그라진 손가락이 펴진다.

저녁 식사는 류시야 대사가 사겠다고 한다. 류대사와 참사관, 영사 분들이 침을 맞겠다고 해서 나는 호텔로 돌아오고 다른 사람들은 타멜 거리로 삼삼오오 다 나간 것 같다.

28일 오전에 짐을 챙겨서 호텔로비에 보관해 두고 두발광장으로 가기로 했다. 먼저 아직 초경이 안 터진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 받는 꾸마리의 예쁜 얼굴을 보러갔다.

Durbar는 ‘왕궁’을 의미한다. 이곳은 옛 왕궁이었다고 한다. 기와집 형식에 나무 조각이 고색창연한 이 옛 왕궁터는 UNESCO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이 되었다고 한다. 세월에 빛 바래고 갈색으로 변색된 나무는 아주 단단해 손톱자국도 안 남는다. 이 단단한 나무에 기기묘묘한 사연(?)이 담긴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관음보살상, 힌두신의 근엄한 모습이 있는가하면 각종 성체위는 인터넷의 포르노 사이트에서도 보기 힘든 초현실적으로 진화된 섹스 장면이 조각돼 있다. 이 조각에는 기묘한 체위뿐 아니라, 그룹 섹스와 獸姦을 즐기는 모습도 조각돼 있다. 정말 聖스럽고 性스러울 뿐이다. 두발광장은 상상외로 문화재가 많았다. 가끔씩 불교풍도 있지만 아무래도 힌두교적이다.

점심은 일식집에서 우동으로 때우고 Pashpatinath사원을 가기로 했다. 이 사원은 화장터가 있어서 매일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낮게 드리워지며 태우고 남은 유골은 가루가 돼 이곳을 흐르는 강물에 뿌려져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들은 이 작은 강이 갠지즈강의 지류인 Ganga강과 지하로 연결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다시 1959년 티벳에 중공의 침공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손수 세운 거대한 스튜파(佛塔)가 있는 보드나트로 갔다. 이곳의 상권은 전부 티벳인들이 쥐고 있다. 이들의 응집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이것이 불탑에 새겨진 진실의 눈의 힘인 것 같다. 원숭이가 많아서 몽키 템풀이라고 불리는 Swayambhunath 사원에 가는 것은 포기한다.

세상은 넓고 환자는 많다

이번 일정은 전반적으로 너무 타이트한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상황을 나름대로 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다 잘 마치게 돼 우리 전 단원들과 이곳을 주재하는 힌두神들에게 감사한다.

우리는 찾아가는 진료를 시도했다. 세상은 넓고 환자는 어디에건 많았다. 이들에게 아주 작은 도움은 됐을 것 같다. 위생이 불량한 곳이라 환자들에게 준비해간 구충제를 충실하게 먹였다.

질병은 다양했지만 소화기, 근골격계 질환이 많았다. 정신신경과적인 환자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최극빈국이란 명칭에 어울리지 않게 ‘행복지수’는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여진다.

네팔에서 굶어죽는 사람, 얼어죽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 보다 훨씬 자연에 가깝게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우리는 奧地에서 의료 시혜를 거의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느꼈다.

참 힘들고 긴 여정을 함께 한 대원 여러분들게 감사드린다. 나는 그 분들의 이름을 이 작은 역사에 기록한다. 진선두, 백인순, 김병수, 오형근, 임인규, 김명희, 노영현, 김영 등 한의사들과 김희선(KOMSTA 총무), 진용석(정발중 2년), 김중식(경향신문), 김태형, 편만열(KBS)이 그들이다.

고소증세로 두통, 소화불량,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면서도 우리는 苦生을 樂으로 삼고 일심동체가 되어 아주 즐겁게 임무를 수행했다. 이것도 因緣일 것이다. 우리는 가끔 단잠을 자면서 잠꼬대로 이 소리를 외칠 것이다. 까하뚝쳐(어디가 아파요)?

< 끝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