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國醫學·歷史遺跡 探訪記(14) - 윤창열

2004-05-28     
□ 신농씨 유적지 여山鎭 (전호에 이어) □

(3) 신농씨가 태어났다는 神農洞

기념관을 지나 오른 쪽 길을 따라 神農洞으로 향했다. 길 왼쪽에는 神農洞을 만들 때 성금을 낸 사람의 이름을 적은 공덕비가 있었다. 신농동으로 올라가니 동굴은 좁은데 쇠창살로 앞을 막아놓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安登이 매일 烈山에 올라 羊을 방목할 때 항상 이 동굴에 와서 휴식을 했다 한다. 한번은 그녀가 동굴 속에서 벽에 기대어 잠을 잤는데 꿈속에서 자칭 七龍子라고 하는 청년을 보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이 깊어지자 임신을 하게 되어 이 동굴속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炎帝神農이라는 것이다.

神農洞 가까이에 있는 安居洞은 굴 입구가 몇 명이 출입할 수 있는 정도인데 비문의 소개에 따르면 이것은 이곳에서 40리나 떨어진 安居鎭과 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막혀 있다고 한다. 神農洞에는 神農廟가 세워져 있다. 참배객들이 가져와서 걸어놓은 휘장들이 걸려있었는데 여기에는 建築之始·音樂之始·貿易之始·陶紡之始·祭祀之始·畜牧之始·農業之始 등의 글이 쓰여져 있었다.

建築之始는 淮南子·主術訓에 “祀于明堂 …… 有蓋而無四方”이라 하였는데 이는 神農이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집을 지었다는데서 유래한 것이다.
陶紡之始는 “神農耕而作陶”와 莊子의 “神農之世 …… 織而衣”와 商君書의 “神農之世 男耕而食 女織而衣”에 근거한 것이다.

百姓之始 神農氏

인간의 역사발전과정에서 수렵·漁撈의 과정에서 農耕의 단계로 진입한 것은 대단한 문명화의 도약이었다. 지금의 모든 후손들은 神農氏의 이러한 은혜를 입고 있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덕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臺灣에서 간행된 炎帝神農世系姓氏次序圖를 보면 神農氏를 조상으로 하는 姓氏는 姜, 白, 洪, 甘, 國, 尙, 丘, 邱, 陸, 余, 崔, 高, 慶, 壬, 章, 方, 呂, 許, 申, 明, 丁, 盧, 左, 柴, 景 등 251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춘추시대의 楚나라는 祝融의 후손으로 神農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금도 廣西의 동人, 貴州의 仲家, 雲南의 擺夷族(파이족)은 모두 神農을 시조로 삼고 있다. 越南의 開國之君은 神農氏의 三世孫인 帝明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월남의 아동들이 讀誦하는 《四字經》에는 “系出神農 首肇封疆”의 말이 있다고 한다.

또 泰國사람, 라오스사람, 미얀마의 샴족도 자칭 炎帝의 후예라고 일컫는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 있어 神農氏는 복희씨를 이어 인류의 문명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공덕을 남긴 사람이 아닌가 한다. 오늘 이렇게 먼길을 찾아왔지만 오늘의 나를 존재케 한 문명의 뿌리, 나의 직업인 한의학의 뿌리를 찾아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였다.

□ 襄樊(양번)市와 米公詞 □

문명사의 한 획을 그은 神農의 유적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서쪽을 향해 차를 달렸다. 중간에 棗陽市를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後漢의 건국자 劉秀의 고향이다.

棗陽市의 남쪽에 있는 白水寺는 劉秀의 고향으로 “龍飛白水”의 故事가 바로 이곳에서 생겨난 곳이다. 후세사람들이 光武帝를 제사지내기 위해 白水寺로 개칭했다고 한다. 淸나라 때까지도 劉秀와 그를 도왔던 雲臺 28장을 제사지냈다고 하는데 아마 지금도 그 자취가 남아 있으리라 생각된다. 조양시를 지나 우리는 襄樊市의 市區에 진입하였다.

襄樊市는 1950년 漢水의 남쪽에 있는 襄陽과 漢水의 북쪽에 있는 樊城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中心市區의 인구는 220만명 정도이고 전체 市(주위의 棗陽市, 宜城市, 老河口市, 谷城縣, 保康縣, 南장縣 포함)의 인구는 570만 정도라고 한다. 시내에 진입했지만 호텔로 가기에는 시간이 좀 남아 있어서 우리는 유적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樊城의 남쪽에 있는 米公祠로 이동했다.

米公祠는 북송시대 때의 大書畵家인 미불(米불)을 기념하는 사당이다. 미공사의 原名은 米家庵으로 元代에 처음 세워졌고 明代에 확장되었으며 후에 米公祠로 고치고 미불의 후손들이 계속 중건했다고 한다.

(1) 宋代 서법 4대가의 한사람인 미불

米불(1051~1107)의 字는 元章, 號는 襄陽漫士·鹿門居士·海岳外史·無碍居士라 했으며 사람들이 米襄陽·米南宮으로 불렀다 한다. 原籍은 太原인데 襄陽에 와서 살았고 만년은 潤州(江蘇省 鎭江市)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徽宗 때 불려 들어가 書畵學博士가 되었고 벼슬은 禮部員外郞까지 올랐다고 한다. 詩文에 能하고 그림과 글씨를 잘 썼으며 筆體가 俊邁하여 蔡陽·蘇軾·黃庭堅과 더불어 宋代四大書法家로 竝稱된다.

입구를 들어가니 구조가 아담한 것이 한국의 정원과 같았다. 배치는 왼쪽이 西苑, 오른쪽이 東苑이었는데 서원입구에는 潔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다. 潔亭은 미불이 평생 깨끗한 것을 좋아한 것을 상징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먼저 서원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에는 宋四大家의 친필비문과 새로 만든 모조품 81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동원에는 삼협에서 나온 水石을 전시하고 있었다. 米불의 글씨 중에는 《蜀素帖》이 가장 유명하여 “素有右軍蘭亭序 南宮蜀素帖”의 美稱이 전해 온다고 한다.

米公祠라고 쓴 입구에는 좌측에 1982년 方毅가 쓴 “米家山水”란 비석이 있고 오른 쪽에는 米氏故里라 쓴 글이 있다. 米公祠라 쓴 拜殿을 들어가니 미불의 후손 米抽傳이 쓴 “顚不可及(미친 행동을 누구도 따를 수가 없다)”이라는 글이 있고 아래에는 미불이 그린 자화상이 있다. 자화상을 마주보면서 우측과 좌측에는 “衣冠은 唐制度요 人物은 晉風流”라고 대련이 걸려 있는데 미불이 당나라 때의 옷을 입기를 좋아했고 인물로는 왕희지와 왕헌지를 숭배한 것을 나타내는 말이라 한다.

미불의 자화상 원본은 후손이 장강삼협에 가서 태웠다고 하는데 이는 미불이 장강삼협을 못 가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미공사를 지나면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옆에는 미불이 죽기 1년 전에 쓴 “動靜交相養賦”가 있는데 여기에 쓰인 動字 12字와 靜字 15字는 모두 달라 후인이 본받기 어렵게 되어 있는데 이를 米字法이라 한다고 한다. 은행나무 뒤에는 미불의 석상이 있고 左右에는 미불의 글씨가 벽에 박혀 있다. 이어지는 寶晉齋는 미불의 書房으로 이 안에는 왕희지를 비롯한 진나라 때의 名人書畵가 있다. 진열관 내에는 미불·황정견·소식·채양 등 四大家의 法帖과 書札이 전시되어 있었다.

(2) 怪石에 절을 한 미불

전시관 안에는 米불拜石圖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無爲州(지금의 安徽省 巢湖市의 無爲)에서 벼슬 할 때 하나의 怪石을 발견했는데 형상이 奇異하고 特異함을 보자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 돌에는 내가 절을 해야만 한다”하고는 즉시 衣冠을 단정히 하고는 절을 몇 번하고 아울러 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로부터 “米顚”이라는 이름이 전하여 지게 되었다. 또 米狂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의 기이한 행동이 미친 사람 같다는 것을 풍자한 말이다.

米불에게는 三怪가 있었는데 첫째는 옷차림에 있어서 唐나라 사람을 모방하여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결벽증이 있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수건 등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고, 셋째는 기이한 돌을 좋아하는 性癖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불의 글씨는 “風檣陣馬 沈着痛快”하다고 하며 글씨의 오른 쪽을 좀 높여 쓴 호방한 기풍이 있다고 한다. <계속>

윤 창 열
대전대 한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