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 ‘전통 한의학’이란 용어

2010-12-02     이충열

시평

'전통한의학'이란 용어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엮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이란 책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이 얼마나 허상일 수 있는지 놀라게 된다. 우리가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으로 알고 있는 체크무늬의 킬트(kilt) 마저도 18,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홉스봄은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유럽에서 국경일, 의식(儀式), 국기 등 ‘전통’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음을 밝혀내면서 이 같은 ‘전통의 창조’가 이제 막 출범한 국민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전통’이 현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전통 한의학’이라는 용어는 어떨까? ‘정통’이 아니고 ‘전통’이라는 용어를 덧붙인 것을 보면 ‘현대’와의 대비를 의식해서 만든 용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전통 한의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전통시대 한의학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의학인가? 고려시대 의학인가, 조선시대 의학인가? 「동의보감」인가, 「동의수세보원」인가? 따져보면 ‘전통 한의학’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만들어진 전통’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용어에 불과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전통 한의학’이라는 용어를 쓰는가? 현대 한의학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전통-현대 이분법을 사용하면 ‘전통 한의학’은 낡고, 이 시대에 맞지 않는 낙후된 의학이 되고, ‘현대 한의학’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개혁적인 의학이 된다.
음양오행, 장상, 경락이론을 ‘전통 한의학’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해 버리면 이 이론들은 우리가 버려야 할 낡은 것이 되고, 대신 과학적 지식, 서양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한의학은 시대에 부응하는 현대 한의학이 된다.

그러나 이런 전통-현대 이분법이 우리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도 생각해야 한다. 애당초 우리가 전통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으로 이분해서 사고해야 할 당위성은 없었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한의학은 현대화, 과학화, 표준화, 체계화의 길을 걸었고 지금의 한의학은 이런 작업의 결과로서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한의학은 ‘한의학’일 뿐 전통 한의학과 현대 한의학 두 종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대화, 과학화의 길을 달려 온 지금의 한의학을 두고 앞으로 한의학으로서 고유성을 좀 더 살려나가야 한다는 입장과, 한의학이 의학으로서 보편성을 확보하는데 좀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서 정체성 논란이 있을 뿐이다.

한의계 일각에서 한의학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한의학적 원리에 입각한’이라는 법률상의 단서가 우리의 행보를 가로막는다는 이유다. 한의학이 변했으니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우리 스스로의 관점부터 먼저 바꿔야 한다.

‘한의학적 원리’라는 문구를 만들어낸 것도 우리들이고, 이를 지나치게 교조적으로 해석해왔던 것도 우리들이다. 한 때 이 문구는 한의사들의 영역을 지켜주는 방파제 같은 역할을 했고, 지금도 일정 부분 이런 역할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제 와 새삼스럽게 ‘한의학적 원리’를 ‘전통 한의학’과 연결시키고 마치 이것 때문에 한의학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처럼 몰고 가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한의학을 새롭게 정의하려면 먼저 우리들 머릿속에 있는 전통-현대 프레임부터 걷어내야 한다. 우리의 토론이 이념 싸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게 만들려면 말이다.

이충열 / 경원대 한의대 생리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