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주 칼럼] 한의사가 의사를 닮아간다?

2008-10-31     
보건사회학을 전공하셨고, 한의학에 호의적이신 한 교수님께서 얼마 전 뜻밖의 말씀을 하셔서 놀란 적이 있다. “나는 의사협회가 주장하는 식의 의료일원화에 찬성하지 않지만, 요즘 한의사들이 무서운 속도로 의사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일원화가 매우 빨리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취지의 이야기였다.

시초부터 의대 교육제도를 모방한 한의대 교육은 논외로 치더라도, 실제 임상에서도 기계와 검사, 서양의학 병명에 의존하면서 고유한 한의학적 진찰능력과 처방능력을 잃어가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하셨다. 또 하나의 ‘기득권 집단’으로 ‘배타적’이 되어가는 모습은 더 큰 문제인 것 같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밖에서 제 3자가 보는 한의사의 모습은 이런 것인가라는 고민을 던져준 만남이었다.

서양의학에서 말기 암 환자에게 너무 많은 불필요한 치료를 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어떤 때는 한방 암치료조차도 끝까지 환자를 놓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여 실망한 적이 있다는 토로를 듣기도 했다. 여생의 삶의 질을 위한 치료가 아니라 공격적이며 비용부담 또한 큰 치료에 환자와 가족 모두 고통 받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셨다. 이 분 역시 한의학 공부와 암치료에서의 협진에 적극적이신 의사였기에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한의사는 물론 한약과 침구라는 수단을 가지고 질병을 잘 치료해야 한다. 그러나 병에 따라 또 단계에 따라 치료할 수 없는 병도 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의학에서도 근래에는 cure뿐 아니라 care에 주목하고 있다. cure가 완치, 치료를 의미한다면, care는 질병의 관리로도 해석되지만, 돌봄 즉 환자에 대한 위로와 도움을 포함하는 말이다. “가끔 병을 치료할 수 있지만, 항상 환자를 도울 수 있다”는 유명한 말도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치유(healing)라는 말은 더 큰 뜻을 가지고 있다. 질병을 삶에서 피해야 하고 몰아내야 할 적이 아닌 손님으로 생각하고 잘 대접해서 보내야 한다는 말처럼, 모든 질병에는 의미가 있다. 몸과 마음의 과로가 감기를 불러 오지 않는다면 탈진해서 쓰러질 때까지 일하는 사람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다. 기거와 음식에서 절도를 잃어 생기게 된 병에 대해, 생활습관의 교정 없이 약을 써서 고쳐 주는 것만으로 醫者의 책임을 다 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암과 같이 큰 병의 진단은 당연히 더 큰 울림을 동반한다. 병의 상태가 심각할수록 환자는 더욱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된다. 병은 식생활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 생각의 방식 전체를 바꾸는 계기로도 작용하고, 그렇게 이전의 삶에서 선회한 사람들 중에 말기암 진단을 받고도 건강하게 오래 생존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오기도 한다. 암의 경과를 돌려놓지는 못했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에 새롭게 눈뜨고, 감사와 행복 속에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분들은 좀 더 많다. 그런 과정을 돕고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치유이다.

여름 같았던 가을 날씨가 오래 계속된 뒤끝인지,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제2의 IMF까지 맞게 되진 않길 바라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계속될 경제 불황의 터널은 피해갈 수 없어 보이는 상황이기 때문에 평년 기온의 추위가 마음까지 시리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주식이나 펀드에는 문외한인데다, 여윳돈도 없었던 것이 개인적으로는 다행이었다고 위안하기에는 국민 모두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큰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질주하던 삶에서 멈춰 서서 덜 먹고 덜 쓰는 ‘소박한 삶’의 가치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면, 쌓였던 병독을 청소해내는 심한 몸살감기처럼 잘 앓아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도 돌아보고, 더 큰 고통으로 내몰리게 될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으면서, 치료는 힘들더라도 아픔을 치유할 수는 있는 우리 한의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