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은 나의 삶36] 라이문트 로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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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은 나의 삶36] 라이문트 로이어
  • 승인 2005.05.0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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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안의 한의사, 한의학 전도사를 꿈꾼다
진정한 세계화는 민감한 시장변화부터 읽어야


서울 삼성동 오피스 밀집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강남인한의원’. 국내 최초의 서양 한의사 라이문트 로이어(41·오스트리아 국적) 씨가 진료를 하는 곳이다.
국내 한의대를 졸업하고 서양인으로는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한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라이문트 로이어 씨. 그를 통해 한의학이 한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 이국땅에 묶어놓을 만큼 강력한 흡입력이 있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적어도 그에게 있어 한의학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명제인 듯 싶다.

진료가 끝나면 새로운 임상을 찾아 공부하고, 대한약침학회 국제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로이어 씨의 일상은 이 시대 한의사의 라이프스타일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한의학의 세계화에 대한 열망이 뚜렷하게 들어차 있다.
“외국인 한의사라 해서 내 인생이 특별할 건 없다. 다만 한의학의 세계화에 쓰일 수 있다면 모든 걸 걸겠다.”

■ 35세에 한의사 된 ‘푸른 눈’

1987년 고국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대 경제학과에 재학하며 회사를 다녔던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동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국을 찾았다. 한국문화를 경험한다며 방문한 태권도 도장에서 운동도중 발목을 삐게 되고 한의원에서 침치료를 받으면서 한의학과 처음 접하게 됐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그는 한의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89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언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연세대 한국어학당에서 1년 동안 공부하고, 90년 강릉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드디어 외국인 특별전형으로 모집하는 대구한의대(당시 경산대)에 91학번으로 입학해 본격적으로 한의학에 입문, 99년 졸업과 동시에 한의사 국시를 통과했다.
한국인들 틈에서 한의학을 배운다고 해서 특별히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모아놓은 얼마간의 돈은 이내 바닥이 나고 외국어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 온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아내 권정근(36) 씨. 한국에 왔을 때 서울 길 안내를 자원한 남자의 여동생으로 5년간의 교제기간을 거쳐 1998년에 결혼했다.

졸업 후 분당 차한방병원 수련의로 1년을 보낸 후 2000년 모처럼 고국을 방문했던 그와 가족들은 대형 트럭과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겪게된다. 이 사고로 그는 온 몸에 골절을 입고 네 살이던 첫 딸 은비를 잃었다.

한의사 동료들은 치료비 모금운동을 벌여 그를 일으켜 세웠고, 부서진 몸은 스스로 한의학을 통해 추스려 오고 있다. 인생의 중요 터닝포인트에 또 한번 한의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전업주부인 아내와 새로 태어난 아들 앤디, 딸 클라우디아를 키우며, 2002년에는 동료 한의사와 현재의 강남인한의원을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 ‘한의학은 준비되지 않았다’

2003년, 다시 고국을 찾은 그는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유럽의 의료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중의학을 교육하는 ‘TCM University’가 빈에 설립된다는 뉴스가 대서특필되고 있고, 무엇보다 침에 대한 시장이 큰 폭으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 TCM대학 총장과 통화해 한의학의 존재를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변은 절망스러웠다.

이미 유럽에는 중의학이 포진해 있는데 특히 중의학, 전통 동양의학을 교육시키겠다는 대학기관에서조차 한의학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은 것이다.
로이어 씨는 “유럽은 무척이나 보수적인 곳이다. 침 시장이 확대됐다는 것은 소비자의 요구로 인해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는 것”이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유럽 최초의 중의대가 설립된다는 것은 기념적인 의미”라는 것이다.
“침 다음에는 약으로 수요가 확대될 것이 뻔한데 한의학은 준비된 것이 없다”라는 자각이 매섭게 꽂혔다.

■ 의료시장 주도권, 시기를 맞춰야

서양인 한의사로서의 유명세는 국내 뿐 아니라 입소문을 타고 외국으로까지 이어졌다.
그의 한의원을 찾는 환자 중 50%는 외국인. 치료를 받으려는 사람 외에 최근 들어 ‘한의학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전화나 메일로 연락해 오는 외국인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동양 전통의학에 대한 수요가 치솟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그는 단정한다.
“유럽에서는 건강보험재정 부담이 높아지면서 비용을 점차 환자에게 전가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환자들은 보험이 적용되는 제도권 의료안에서만 치료를 받았지만, 스스로 돈을 지불하는 상황에서는 보다 좋은 의료를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관심이 제도권 밖 대체의학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동종요법은 독일에서 고안된 대체의학으로 건강한 사람에게 질병의 원인물질과 같은 종류의 약물을 희석해 투여하는 치료법으로 고향을 떠날 즈음에는 일부에서 시술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동종요법으로 만들어진 약을 어디서든 살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된 현실을 보면 침, 약도 이러한 변화의 기류를 탈 것”이라면서 “중의학 붐을 타고 국제사업을 통해 한의학을 알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 “먼저 알려야 한다”

지난해 그는 대한한의사협회로부터 복지부에 제출할 ‘한의학의 세계화 추진’에 대한 사업기획서를 제안받았다.
그는 그동안 생각해 왔던 구상들을 보고서에 담기시작했다. 유럽의 동향에 맞추어 ‘먼저 한의학을 알려야 한다’는 목표에 따라 당장 한국에서 추진해야 할 사업들을 세부적인 일정과 함께 제출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니스 선수의 매니저로서 모나코에서 피트니스클럽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피트니스클럽을 프랜차이즈로 확대시키기 위한 계획에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 사업가는 프랜차이즈 1호점에 들어맞을 특별한 아이템을 찾고 있었고, 로이어 씨는 한의학적 건강관리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세계적 이목을 끌 수 있는 기회에 한의학이 여러 아이템과 접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다면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사업 및 투자계획서(1억원 규모)를 작성, 추진했으나 한의사협회의 비협조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는 요즘 “‘한의학의 세계화’라는 구호만 있을 뿐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다”는 허탈감에 빠져있다.
시도했던 일이 물거품이 됐지만 그는 깨끗하게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십전대보탕을 수입해서 먹는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라면서 “국제사업을 통해 한의학의 위상을 높이고, 외국에서 한의학이 인정받으면 양방의 공격도 불식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과학적 한의학 효과 확신

그는 영어와 독어가 가능한 한의사인 덕분에 외국인 환자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유럽 및 영어권 환자가 대부분이며 질환 중에는 부인과에 자신감을 보였다.
사고 이후로 골절된 왼쪽팔은 여러번 수술을 거쳤지만, 4cm 정도 짧아졌고, 꾸준한 재활치료로 움직임은 훨씬 수월해졌다고 한다.

자신의 재활을 위해서, 또한 임상적으로 접목하기 위해 한국전통무예를 배우고 있는 그는 “한의학 임상의로서 그 효과를 스스로 매일 확인하고 있다. 내가 치료하는 외국인들도 다시 찾아오는 것은 한의학의 치료효과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근 그는 전직 물리학교수로부터 온갖 공식과 표가 빽빽히 들어차 있는 노트를 받았다. 그 교수는 TV에 나온 로이어 씨를 보고 한의학을 물리학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보내면서 ‘과학적인 한의학’을 세계적으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고.
국내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 한의학 칼럼을 쓰면서 낮에는 진료하고, 나머지 시간은 한의학 공부에 투자한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로이어 씨는 담담히 대답했다. “최근 몇 년간 한의학의 세계화를 고민했다. 지금이 위기이기 때문이다”면서 “장소가 어디든 변함없이 계속 한의사로 일할 것이다. 다만 한의학의 세계화에 내가 이용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일할 준비가 돼 있다”고 힘있게 말했다.

오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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