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9) 어린이들이 품위를 지킬 수 있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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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9) 어린이들이 품위를 지킬 수 있으려면
  • 승인 2023.02.16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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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지각대장 존의 한 장면
◇지각대장 존의 한 장면

매주 두 세 시간 정도 마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다. 과자 먹으며 수다도 떨고, 같이 줄넘기를 하거나 책을 읽고, 근처 미술관이나 천문대에도 다녀오곤 한다. 말하자면, 어린이들이 심심한 아줌마랑 놀아주는 셈이다. 설 연휴가 끝난 2주 전쯤이었다. 역시 아이들과 모여서 빨간 날 뭐하고 지냈는지 이야기하던 참이었는데, 동네 어른이 오셔서 “세뱃돈은 다들 얼마나 받았냐?”는 핵폭탄과 같은 질문을 투척하셨다.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정신이 아득해지는 동안, 애들은 각자 받은 세뱃돈 액수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그분은 말을 하지 않고 앉아있는 아이 하나에게 재차 “너는 얼마 받았냐”고 물으셨다. 묶지 않은 긴 머리를 그대로 뺨 옆에 내려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2천 원이요.”

이후 언뜻 보기에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평소처럼 놀다 갔지만, 그 일은 일주일 내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나를 불편하게 했다. 가정형편이 가장 좋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가 친구들 앞에서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을 끝내 말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느꼈을 수치심, 당혹스러움 등이 너무나 선명했다. 그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관하고 있었던 어른인 나라니. 내내 부끄러워서 마음에 걸렸다. 일주일 후에 아이들과 다시 마주 앉아, 그날 세뱃돈에 대한 질문은 전혀 적절하지도 않았으며 자기가 돈 많이 받은 걸 자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해주고서 ‘모욕’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어린이일 때 어른들에게 받았던 모욕의 경험들을 들려주자 그 아이의 얼굴은 대번 (발그레도 아닌) 검붉은 색으로 달아올랐다. 다음에 또 이런 상황이 생겼을 때 대처법을 연습해보자고 하니, 아이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씹듯이 뱉어냈다. 그날 아이는 자신의 품위를 애써 지키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했을 뿐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던 거였다.

어린이들의 품위라니 좀 낯선 말일 수도 있겠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다보면 품위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어린이들의 사례가 여럿 나오니 참고하시길.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유치원 어린이들에게 압도적 호응을 받았던 ‘스스로 코를 푸는 법’에 대한 특강이다. 저자는 유치원생들이 그 강좌에 얼마나 집중했었는지를 이야기하며, 어린이들이 어른들 앞에서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을 뿐 갖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뭔가 모자란 존재, 뭔가 부족한 존재로서 취급받지 않기 위해 어린이들은 애를 쓴다. 코 푸는 연습뿐 아니라 일상적인 모욕을 감내하면서 품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셈이다.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모욕한다니 황당하고 억울한 말일 수도 있겠으나, 실제로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일상다반사로 모욕을 당한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다는 이유로 선생님에게 불려가 뒤통수를 얻어맞거나, 집에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씻기 어려운 아이에게 다짜고짜 머리 좀 감고 다니라고 잔소리를 하거나, 하지 않은 일로 비난받는 등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상의 모욕들이다. 어린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큰 핸디캡이 되는데, 게다가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사회적 관계가 두텁지 않아 지지해줄 사람들이 별로 없는 아이들은 더 쉽게 궁지에 몰리곤 한다. 그리고 그런 모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학습하지 못한 채, 그게 부당한 모욕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고작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으로 대응할 뿐이다.

존 버닝햄의 <지각대장 존>이란 그림책에서, 학교에 가던 존은 하수구에서 튀어나온 악어나 덤불 속 사자를 만나거나 산더미같은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매번 지각을 한다. 하지만 존이 선생님에게 사실대로 말을 해도 선생님은 믿어주지 않고, 항상 거짓말을 했다며 존에게 벌을 준다. 존은 선생님의 모욕을 그저 견딜 뿐이다. 책의 말미에서 선생님은 털복숭이 고릴라한테 붙잡혀 천장에 매달린 채 존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그러나 존은 “이 동네 천장에 커다란 털복숭이 고릴라 따위는 살지 않아요, 선생님.”이라고 대꾸하며 선생님을 지나쳐버린다. 어린이들도 존처럼 아주 가끔은 어른들에게 시원하고 통쾌한 복수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뱃돈으로 2천 원 받은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하는 어른에게 여유 있게 웃으면서 “그런 게 왜 궁금하세요?”라고 대꾸하거나, 세뱃돈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는 친구에게 “너는 자랑할 게 그런 거밖에 없어?”라고 면박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아이가 속으로 구겨지는 대신, 웃는 얼굴로 되받아치고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네 아줌마랑 마주 앉아 모욕과 천박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방 밖을 나가면 온통 세상은 악어와 사자, 산더미 같은 파도 천지인데다 그런 말을 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가진 게 없는 데다 어리기까지 한 사람들이 자신의 품위를 지키기가 몹시 어려운 세상이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 “세뱃돈 얼마 받았냐”는 등의 질문을 어린이들에게 한다면 이제 좀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재빨리 그런 입을 틀어막거나 어른들을 대표해서 대신 사과할 수 있는 정도의 힘은 우리 어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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