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인류학하기](8) 정든 다리와 작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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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인류학하기](8) 정든 다리와 작별하며
  • 승인 2023.01.13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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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정

신유정

mjmedi@mjmedi.com


◇(구)문척교의 모습. 사진 오른편 강둑의 정자는 원래 섬진강을 건너기 위한 나루터 자리에 세워졌다.

읍내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오려면 섬진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는 다리는 두 개가 있지만, 구례로 이사 올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오래된 옛 다리로 섬진강을 건널 때의 경관이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벚꽃도 피어 적당히 좋은 날씨에 차도 거의 다니지 않는 다리 위를 전동킥보드 타고 건너면서 강바람을 맞을 때, 아 이런 걸 행복하다고 하는구나 생각한 순간도 있다. 아무래도 이 다리의 매력은 상판의 높이인 것 같다. 1972년 완공된 다리라 요즘 다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게 시선이 낮아 강과 가깝다. 눈높이가 낮다 보니 지리산과 섬진강에 폭 안겨있는 느낌인데다 낡고 소박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주는 독특한 정취가 있다. 바로 옆 10 미터를 더 높여 세운 웅장한 신식의 다리에서는 도무지 느끼기 어려운 감상이다.

다리의 정식 이름은 문척면의 이름을 딴 문척교, 마을 사람들은 구다리, 잠수교라고도 불렀다.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다리가 강물에 잠기는 탓이다. 읍내 한 철물점 사장님은 오토바이 타고 옛 다리를 건너 배달 다녀오던 길에, 다리 위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시를 지어 등단을 했다. 인근 구성마을, 안지마을 할머니들은 요즘도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 오래된 다리를 건너 읍내로 나가고들 한다. 하지만 정든 이 다리는 2023년 1월 9일부터 본격적인 철거 작업에 들어간다. 이제 이 다리 위에 가만히 서서 강바람을 맞거나 가끔 차를 세워두고 해 지는 모습을 보며 멍 때리는 사치는 더 이상 부릴 수 없게 되었다.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 내가 살고 있는 문척면은 섬나라였다고 한다. 섬진강을 건너야 하니 나루터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이 읍내로 나가려면 배를 타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발 다리 하나 만들어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면민들이 가가호호 보리쌀 등 나락을 한 됫박씩 거출해 ‘로비’를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문척교인 셈이다. 하지만 다리 양쪽에 연결된 낮은 제방이 2020년 8월 물난리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영산강 유역청과 구례군이 다리 철거에 착수했다. 당장 2022년 9월에 철거하기로 했던 다리가 이제야 작업에 들어가게 된 것은, 뒤늦게 그 소식을 알게 된 인근 주민들이 지난 7월부터 철거 반대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풍광을 사랑한 것이 우리 가족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물론 다리 철거를 결정한 데에는 훌륭한 명분이 있었다. 수해 예방과 주민 안전. 반대하는 주민들은, 낮은 제방이 문제라면 제방을 높이고 대신 한강의 잠수교처럼 필요할 때 여닫을 수 있는 차수문을 설치하자며 대안을 제시했다. 애초에 섬진강 범람이 홍수기 댐 운용의 문제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옛 다리가 수해 원인이라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주민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환경청과 구례군에서는, 50년 된 낡은 교량이라 기둥이 촘촘하게 박혀있고 상판 높이가 낮기 때문에 철거해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다. 왜 차수문이 안 되는지에 대한 답은 어느 쪽에서도 듣지 못했다.

게다가 이 ‘안전’이라는 말에 도보로 이동하는 교통약자들의 안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옛 다리는 지방도와 바로 연결되지 않은 덕분에 트럭 등 중장비들이 거의 다니지 않아,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통로였다. 그래서 주로 전동휠체어 탄 노인들, 자전거로 이동하는 학생들이 읍내를 오고 갈 때 이 다리로 강을 건넜던 것이다. 기존의 다리를 철거한 후 같은 위치에 30 미터(!)를 높여 멋있는 새 보도교를 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새 다리가 지어지려면 최소한 2-3년은 지나야 한다. 지금 그 다리를 건너는 노인들 중 상당수는 새 다리를 건너보지도 못할 것이며 다리를 건너기 위해 30미터 제방을 기어 올라갈 일은 상상만으로도 버겁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 정부나 지자체를 끝내 주민들이 이겨 먹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고, 결국 문척교도 그렇게 사라지게 되었다.

장소는 기억과 경험, 그 장소에 머물던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항상 원래 있던 것들을 다 허문 후 새로운 철근-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해결하려 드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토건국가적 관행은 워낙에 강력하다. 그 앞에 버티고 서서, 옛 다리라는 ‘장소’가 50여 년간 담아냈던 관계나 기억 등의 가치를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철거가 무산되면 중앙정부와 도에서 내려오는 거액의 사업비가 날아갈 판에, 낮은 다리가 주는 운치, 노인과 아이들이 트럭 걱정 없이 걸어 다닐 수 있는 안온함, 다리를 만들 때 가가호호 뒷박을 모아 공들였던 추억 등을 말하는 것은 너무 철없이 떼를 쓰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때마침 물난리라는 근사한 명분도 생겼다는 것을 기억하자. 클라인이 ‘재난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지구 어디서든 정부와 자본가들은 재난을 핑계로 그전부터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을 하고야 만다. 이를테면 문척교 철거 후 새 다리를 건설하는 식의 사업에 착수해 약 200 억의 예산을 따내는 일 말이다. 2020년 8월의 재난은 아직도 이처럼 끈질기게도 주민들의 일상을 파고든다.

잘 가라 다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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