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칼럼](117) 한 발짝만 비켜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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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칼럼](117) 한 발짝만 비켜서면?!
  • 승인 2022.05.20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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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호

김영호

doodis@hanmail.net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김영호
한의사

성공한 사람일수록 주도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주도(主導)라는 한자 그대로, 어디서든 주인공처럼 리드하려고 한다. 사회와 가정에서 상호 관계의 성격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며 주도권을 놓치지 않는다. 뒤처지는 사람이 보이면 당겨 와야 직성이 풀리고, 침묵이 흐르면 자신의 말로 가득 채워야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주도성이 강한 사람들의 이 성향이 가끔 뜻밖의 결과로 이어질 때가 있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G융은 ‘모든 형식화된 종교의 주 기능은 사람들이 신을 직접 경험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신과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데 종교적인 형식이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신의 참된 가르침을 막고 자신과 종교 그 자체를 추종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형식적인 것들로부터 한 발짝만 비켜서면 신을 직접 경험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사제의 주도 아래 직접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존경받는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그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만 가는 것은 종교가 본디 추구하는 바가 아닐 수 있다.

 

부모자식 간에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난다. ‘아이를 위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는 부모의 주도성이 자녀의 미래를 방해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넘어지고 일어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잠재력을 펼쳐나가는데, 부모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은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주도하에 안전한 길만 걷다보면 자신의 인생이 스스로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기도 한다. 어른 뿐 아니라 아이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주도할 때 잠재된 가능성이 드러난다. 사회의 영향을 덜 받은 어린 시기의 호기심이야 말로 신이 준 가장 큰 선물이다.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 될 수도 있고 인류를 구할 특별한 재능일 수도 있다. 부모의 주도성이 약할수록 호기심은 더 크고 또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어느 한 쪽의 주도적 리드는 관계의 균형을 깨트릴 때가 있다. 한 쪽이 리드하고 다른 한쪽은 그저 따라가는 게 익숙해지면 함께 키워가야 할 사랑이 성장을 멈춘다. 주도하고 싶은 마음을 줄일수록 상대방의 역할이 커지고 두 사람의 사랑은 커 나가겠지만 한쪽의 주도성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다. 주도하고 싶은 마음을 참고 따뜻한 침묵으로 기다려줄 때 사랑은 다시 성장한다. 침묵의 기다림 뒤, 상대의 마음은 조용히 드러난다.

‘너를 위해’라는 타인의 주도성에 나를 내맡기지 말자. 나를 위해 주어진 모든 것은 익숙한 그늘이 될 뿐이다. 그늘 안에 머물기 시작하면 어느새 빛이 싫어진다. 뜨거운 빛을 향해 자신의 발자국을 내딛을 때 그늘도 시원한 법이다. 반대로 소중한 사람을 위해 주도하려고도 하지 말자. 나의 도움보다 더 큰 뜻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를 위해 세상이 준비한 최고의 교육과정을 좁은 나의 안목으로 치워버리지 말자. 주도성은 타인이 아닌 스스로 발휘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낸다.

저 멀리, 눈부시게 밝은 빛이 나를 비추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그런데 그 앞을 막고 있는 커다란 존재가 있다. 큰 존재의 그늘이 익숙하다면 잠시 생각해보자. ‘나는 보호받는 것일까 아니면 가로 막혀 있는 것일까?’ 보호받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면 그림자는 점점 커진다. 지금 이 아니면 점점 커지는 그늘을 벗어나기는 어려워진다. 그림자가 더 커지기 전에 확인해야 한다. ‘보호받는 것인지, 장애물인지.’ 한 발짝만 비켜 서보자. 그 정도의 용기만 있다면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늘을 드리우는 존재일 수 도 있다. 소중한 사람을 보호한다는 자부심으로 시작됐지만 어느 새 그의 주도성을 억누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빛을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지, 상대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 아닌데 지나치게 먼저 도와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상대가 원하는 것이 아닌데 내가 먼저 권유한 것은 없는지 늘 경계해야 한다. ‘너를 위해’라는 아름다운 명목은 ‘너 때문에’라는 질책으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시원한 물은 목마른 자에게만 달콤하다.

칼 구스타프(G) 융의 말을 나의 언어로 재해석 해본다. “종교의 본질은 신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신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다. 신을 경험한다는 것은 곧 크고 작은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보자. 그저 한 발짝 비켜 서보는 정도면 충분하다. 그것이 곧 우리 안의 신을 만나는 일이다. Step aside~!”

김영호
12년간의 부산한의사회 홍보이사와 8년간의 개원의 생활을 마치고 2년간의 안식년을 가진 후 현재 요양병원에서 근무 겸 요양 중인 글 쓰는 한의사. 최근 기고: 김영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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