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의 임상8체질]盧正祐와 Arthur Stein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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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의 임상8체질]盧正祐와 Arthur Steinberg
  • 승인 2021.10.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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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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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38

  대한한의사협회에서 국제적인 학술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것은, 1965년에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도쿄에서 열렸던 국제침구학회가 처음이다. 대표단은 배원식 진태준 권도원 세 명이었는데 권도원 선생은 10월 20일에 체질침 논문을 직접 발표했다. 권도원 선생이 한의사협회의 일원이 되는 데는 1960년부터 노정우 선생이 베푼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SIA
  유럽에서는 1950년대 초반에 독일침술학회, 프랑스침술학회, 오스트리아침술학회 등이 생겼고, 이런 조직들을 중심으로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침술학회가 성립되었다. 이 학회의 명칭은 프랑스어 표기에 따라 SIA1) 라고 약칭한다. 국제침술학회는 1965년 5월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회의까지 총 열세 번의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유럽에서 꾸준하게 국제적인 침술학술회의가 개최되는 동안 동아시아 3국에서는 이렇다 할 국제적인 학술회의가 열리지 못했다. 당시의 정치적 배경 때문이겠지만 동양의학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대륙과 서구사회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2년에 10월 6일부터 8일까지 대만의 중산당에서 제12차 국제침구학회 아주지구대회가 열렸다. 이것은 중화민국침구학회 주최로 열린 것인데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국제학술회의이다. 학술회의 명칭에 ‘제12차 국제침구학회’라고 한 것을 보면 이 학술회의는 주최 측이 유럽의 SIA와 협의하여 ‘International Acupuncture Conference’의 개최 전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國際鍼灸學會
  일본에서는 1950년을 전후하여 두 개의 침구 관련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일본침구의학회(JSMA/1948)와 일본침구치료학회(JAMS/1951)이다. 1965년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도쿄 우에노(上野)공원에 있는 동경문화회관에서 열린 국제침구학회를 개최한 것은 일본침구치료학회이다. 그리고 한참 후에 1977년에 열린 제5회 세계침구학술대회는 두 단체가 협력하여 개최하였다.
  일본침구치료학회는 1965년에 학회 발족 15년을 기념하여 국제학회를 개최하면서 그것은 당연히 제1회 국제침구학회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최 측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국제침술학회(SIA)는, 1965년 5월 비엔나 대회까지 13차례의 국제침술학회를 개최한 상태였다. 프랑스 측은 국제침술학회가 이미 유럽에 존재하고 있고, 지금까지 비엔나 회의까지 13회가 이어졌으며, 과거에 일본으로부터 이 학술회의에 이미 대표가 참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1965년 10월의 일본 국제침구학회는 제14회 국제침구학회로 해야 한다고 하며 선취권을 주장하고 양보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의 학회(SIA)와 일본의 학회(JAMS)가 정식으로 협의하여 진행한 국제학술회의는 도쿄가 처음이므로 일본 측으로서는 국제침구학회로서는 제1회로 하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유럽에서 개최한 학회에 일본에서 개인적으로 참가한 것을 양쪽의 조직이 협의하였다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표는 아시아에서 거행된 것이기 때문에 아시아국제침구학회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1962년 10월에 대만에서 제1회라고 칭하는 것이 거행되었는데, 만약 아시아국제침구학회라고 한다면 제2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의견도 일본 측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술회의 명칭과 개최 회수의 지정 문제로 국제침술학회 본부가 있는 프랑스와 1회 개최라고 주장하는 일본 사이에 타협점을 찾지 못하다가, 프랑스가 새로운 명칭으로서 「국제침구세계대회」를 제안했고 이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그리고 차기 대회는 1969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하기로 하고 서양(유럽)과 동양(일본)의 독자적인 기구들을 통합한 ‘국제침구세계대회(國際鍼灸世界大會 International World Congress of Acupuncture & Moxibustion)’로 하기로 하였다. 개최 회수의 지정 문제는 결론을 짓지 못하고 차기 모임으로 넘겼다. 

WCA
  1969년 5월 14일부터 18일까지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2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는 대한한의사협회의 대표로 최진창 이정규 이창빈 세 사람이 다녀왔다. 최진창과 이정규는 6월 16일에 신문회관강당에서 귀국 보고를 하였다. 파리에서는 1973년에 열릴 제3차 대회의 개최지로 홍콩이 추천을 받았는데, 회의 석상에 홍콩 대표가 참석을 하지 않아 개최를 포기하는 형식이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서울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한국이 유치하게 된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World Congress of Acupuncture)는 대한한의사협회와 경희대학교의 공동 주최로 1973년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조선호텔 회의실에서 열렸다. 공동 개최 측인 경희대학교는 아주 의욕적으로 참가했고 경희대 조영식 총장은 명예총재로 추대되었다. 집행위원장은 박승구 대한한의사협회장이었고 노정우 선생은 학술부장을 맡았다. 
  제3차 세계침구학술대회에 미국침술학회2) 회장 자격으로 참가한 Arthur Steinberg는 노정우 선생과 처음 만났다. 경희대학교도 방문했다고 하니 대학교의 주요 인사들도 이때 만났을 것이다. 25일에 열린 각국 대표자 회의에서 대회규약을 제정했는데, 4년마다 열리던 대회를 2년마다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래서 제4차 대회는 1975년 2월 17일부터 21일까지 5일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가스에서 열렸다. 

盧正祐
  노정우 선생은 어려서부터 병투성이였다. 1968년 4월에 펴낸 『현대인의 한방』에서 자신이 「질병의 집」에서 태어났고 병의 화신인지도 모른다고 썼다. 1918년 12월 28일에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사기리에서 태어났다. 첫 이름은 영석이고, 동휘와 중휘를 거쳐서 정우로 개명했다.  검정시험과 국가시험을 통과하여 1954년 8월에 한의사(면허번호:613)가 되었고, 서울한의과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시작해서 1958년에 동양의약대학에서 부교수가 되었다. 1971년 3월부터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한의학부장과 한방병원장을 맡았고, 1972년 11월에는 정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학부에서는 사상의학과 내과학을 강의했다.
  
Arthur Steinberg
  1972년 2월 17일에 닉슨 미국 대통령은 역사적인 중화인민공화국(中共) 방문길에 올랐다. 이것은 미국과 중국대륙의 새로운 시대와 관계를 여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특별히 중국의 침술이 서구 사회에서 각광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에 Arthur Steinberg3)는 64세였고, 그의 중국인 아내 Shirley Bia4)는 41세였다. 그는 그때 거의 은퇴한 변호사였는데, 실제로는 부동산 개발업자로 부동산계의 거물이었다. 1950년대에 스타인버그 형제는 라스베가스에서 사용되지 않는 구획에 투자했다. 그는 한때 라스베가스에서 가장 큰 카지노 중의 하나인 The Mint Casino의 주인이었다. 스타인버그는 침술에 열광적인 지지자로 뉴욕과 라스베가스를 오가면서 침 치료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편두통을 앓고 있었고 그는 청력이 저하되어 있었는데, 여러가지 치료를 통해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1972년 여름에 스타인버그 부부는 홍콩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중의사인 Professor Yee Kung Lok5)을 만났다. 그의 치료를 받고 Shirley Bia는 놀랍게 호전되었다. 스타인버그는 Dr. Lok의 침술에 크게 감명을 받아, Dr. Lok의 침술과 크리닉을 소개하는 2시간이 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스타인버그는 Dr. Lok이 당시에 홍콩침술대학의 학장6)이었다고 본국에 소개한 듯한데, Lu Yigong(陸易公)은 1946년에 성립한 구룡중의사공회(九龍中醫師公會) 소속으로 회립구룡중의학원(會立九龍中醫學院)의 교수였고, 또한 그곳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던 것 같다.  
  당시 미국에서 침술에 대한 법률제도를 갖춘 주(State)는 하나도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스타인버그는 네바다주에서 중국의학과 침술이 합법화되기를 원했다. 네바다주는 지리적으로 큰데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서 주민들과 의사소통이 쉽고, 입법활동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음을 인지했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로 침술열병이 미국을 사로잡았고, 미국의학협회(AMA)는 각 주에서 침술 법안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면허가 있는 MD만 침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방향이었다.  

Dr. Yee Kung Lok
  스타인버그는 의회를 설득하고 시민들의 침술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Dr. Lok이 의원들 앞에서 침술을 시연하고 시민들을 치료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내었다. Dr. Lok의 침술 시연은 처음에는 거부되었다. 스타인버그는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30분짜리로 축약하여 네바다주의 여러 도시7)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방송했다. 이것은 캠페인이었다. 
  그런 후에 네바다주의 의원들에게 Dr. Lok의 침술 시연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이 서한 이후에 네바다의회의 건강복지위원회와 주의 기구에서 ‘응급법안’이 선언되었다. 1973년 3월 13일에, Dr. Lok의 침술 시연을 허락하는 SB420이 서명되었고, 침술에 대한 주면허국의 감독과 지휘 아래 중국의학의 개업을 허가하는 법안인 SB448이 상정되었다. TV방송은 네바다주 전역에서 침술에 대한 압도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3월 19일부터 4월 6일까지, 카지노와 호텔 그리고 거리 네바다의회 빌딩에서 수백명의 시민들이 Dr. Lok의 침술 시연을 보고 치료도 받았다. 의원들도 있었다. 마침내 1973년 4월 20일에 주지사 Mile O’Callaghan이 법안 SB448에 서명했다. 네바다는 미국에서 침술과 중국의학의 체계를 합법화한 최초의 주가 된 것이다.   


※ 참고문헌
1) 김남일, 의사학으로 읽는 근현대 한의학 (248) 『한의신문』 1925호 2013. 6. 24.
2) Arthur Yin Fang, 「Nevada : the first state that fully legalized acupuncture and Chinese medicine in the United States」 2015.

 

각주

1) Societe Internationale d’Acupuncture
2) American Society of Acupuncture, INC.
3)  (1908. 10. 10. ~ 1994. 10. 16.)
4)  (1931. 10. 10. ~ 2012. 11. 18.)
5)  중국 이름은 陸易公으로 Lu Yigong이다. 영어 이름은 Benjamin Yee Kung Lok이다. 
6)  the President of the Hong Kong College of Acupuncture
7)  Las Vegas, Reno, Carson City 

 

이강재 / 임상8체질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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