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각자의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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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김린애의 도서비평] 각자의 한국 현대사
  • 승인 2021.08.27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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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린애

김린애

mjmedi@mjmedi.com


도서비평┃나의 한국현대사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한국 현대사는 위험한 화제이다. 이 화제를 입에 올렸다가 잘못되면 가족과 싸울 수도 있고, 교제한 지 얼마 안 된 연인과 관계를 재고해야 할 수도 있고 지인들과 서먹해질 수도 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의 입장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책의 서문에서 밝히듯,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은 현재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 주역들이 살아있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는 모두 한국 현대사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유시민 지음, 돌베개 출간

이렇게 위험한 화제로 이야기를 해야 할 때 갈 수 있는 우회로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 소시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국제시장>의 주인공들은 현대사의 장면들을 종횡무진 돌아다니지만 딱히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 연예인들이 종종 사용하는, 공부가 부족하다고 사과하고 언급을 피하는 화법도 이와 비슷하다.

또 하나는 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형태로 이야기하는 방법이다. 청문회 같은 곳에서 종종 나오는 “교과서에 쓰여있는 내용에 동의합니다”라거나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표현이다. 간접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자신만의 의견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서 부담을 줄이는 것이다.

교과서나 보고서를 쓸 때처럼 가치판단을 전혀 보이지 않고 통계나 기록만 열거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어떤 자료를 꺼내느냐 어떤 순서로 내보이느냐도 “의견”이기 때문에 진짜로 가치판단을 보이지 않는 방법은 아니다. 그래도 간접적인 방법이니 말하는 입장에서는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다.

이 책의 저자인 유시민 작가는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이런 우회로를 가지 않는다. “프티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대학생 시절엔 공부보다 정부와 싸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썼고,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공직사회를 경험한 “나”, 현 정부의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 지식 소매상이 되겠다고 공언한 사람의 눈으로 난민촌 국가, 병영 국가를 거쳐 탄생한 민주화 시대의 광장 같은 “한국”의 현대를 바라보았다고 우회 없이 직설한다. 작가의 시각에 온전히 동조하지 않더라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음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그에 어울리는 멀끔한 글은 읽기 시원해서 즐겁다.

<나의 한국현대사>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은 “나”의 시점변화이다. 저출산과 인구 구조의 변화, 산림녹화사업과 그린벨트의 변화, 경제 정책의 변화 등을 이야기할 때는 다른 역사책들과 마찬가지로 사료와 통계를 들고 자신의 의견이나 예상, 바람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기생충 검사를 받으면서 자란다. 1979년 대통령 유고와 계엄령 선포를 라디오 뉴스로 듣고 친구들과 기뻐하다가 집주인 아주머니께 혼난다. “학생들 너무 좋아하진 마. 그래도 사람이 죽은 거잖아.” 혼나던 20대 청년은 그렇지 않아도 찜찜했다고, 독재자도 사람인데, 사람이 죽었다는데 기뻐하는 건 도리에 어긋나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1983년, 공해 문제를 연구하는 이를 “이런 시국에 한가하게 무슨 공해 문제를 연구하냐”며 놀리고 슬레이트에 삼겹살을 구워 먹던 일을 회상한다. 어떤 대목에서는 역사적 사건의 당사자이다. 1980년 서울역에서 정부에 대해 강경한 연설을 하면서 내심 느끼던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과 죽음에 대한 공포, 고립감을 회상한다. 그리고 1987년은 이렇게 말한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년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은 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덮고서 나는 가족들과 이야기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1980년 어디에 있었나, 어떤 뉴스를 들었나 IMF 때랑 지금이랑은 어떻게 다른 것 같나 하는 각자의 현대사를 나누었다. 또 서울 시청 앞 광장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들고 있는 이를 바라보며 상상을 하곤 한다. 저 이는 어떤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총에 맞아 사망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유시민 작가, 나, 내 가족, 수많은 타인 모두 다른 자리에서 한국을 겪어왔고 각자의 한국 현대사는 각자의 생각을 낳았다. 이 생각의 차이는 좁혀나가기에는 너무나도 뿌리가 깊고 단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방은 각자의 역사라는 뿌리를 가진 사람이고, 괴물이 아니라고 바라보는 시점은 많은 이들이 함께 한국에 서 있는데 도움이 된다.

 

김린애 / 상쾌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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