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주역] 풍화가인 - ‘다움’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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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주역] 풍화가인 - ‘다움’의 어려움
  • 승인 2021.07.2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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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원

박혜원

mjmedi@mjmedi.com


박혜원
장기한의원장

개원의는 좋건 싫건 하루에 수십명의 사람을 만난다. 그러다보면 연령층에 따른 차이를 관찰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기 부인을 지칭하는 단어 사용이 세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아주 노년층에서는 ‘우리집 할망구’라며 장난스레 부르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 장노년층은 ‘우리 집사람’, ‘우리 아내’라는 단어를 많이 쓴다. 한참 아이 키울 나이의 3~40대들은 ‘애들 엄마’, ‘와이프’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나는 집사람, 아내와 와이프 사이에서 사회의 단층을 느낀다. 어감상 ‘와이프’는 아침에 같이 출근하고 저녁에 같이 들어와 가사 노동 분담을 요구하는 배우자 같고, ‘집사람’이나 ‘아내’는 가사 노동을 전담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진하게 든다.

주역에는 家人괘가 있다. 집사람 괘이니 괘사부터 女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풍화가인 괘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家人 利女貞

彖曰 家人女正位乎內 男正位乎外 男女正天地之大義也 家人有嚴君焉 父母之謂也 父父子子 兄兄弟弟 夫夫婦婦 而家道正 正家而天下定矣

 

괘사에는 여자의 바름이 이롭다고만 되어 있으나 단전에 보면 가족구성원들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흔히 ‘여자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의 근거로 쓰이기 일쑤였으나 실상은 내치를 담당하는 사람이 바르게 이끌어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제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바깥일을 하는 사람이 여자일 수도 남자일 수도 있지만, 주역이 쓰여진 시대가 약 2500년 전이며 안팎을 구분하는데 있어 안쪽은 음에 속하니 여성으로 비유한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화목한 가정’이라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은 있지만 우리 집은 아닌’ 것에 가깝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사람이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였다고 해서 모두 같은 규칙을 지키며 계획대로 살아가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족 구성원들의 면면을 잘 살피고 조율하는 역할은 그 가정의 리더가 되는 사람의 몫이다. 그러니 그 사람-여기에서는 여자가 바르게 해야 이롭다는 것이다.

 

初九 閑有家 悔亡

 

초구는 가장 아래에 있는 양효이다. 바람 밑의 불이니 화르륵 타오를 가능성이 있다. 가족 구성원으로 보자면 마구 뛰어다니는 어린 남자아이이다. 남자 아이를 양육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녀석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른들을 놀라게 하는 사고도 더러 저지른다. 이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녀석을 제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이 집안 어른들의 몫이다. 그 책임을 등한시했다가는 크게 다치거나, 최악의 경우 아이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미리 주시하고 사고를 방지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六二 无攸遂 在中饋 貞吉

 

육이는 아까 그 망아지같은 초구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것 같다. 본래 밖에 나가 일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지금은 바깥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바로 옆에 있는 초구를 단도리하며 가족들의 식사 준비를 도맡아하는 중이다. 육이는 내괘의 중앙에 있으며 음이 음 자리에 바르게 있으니 在中했다고 하였다. 가족을 흔히 ‘식구’라고 부른다. 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을 가족의 범위 안에 두는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밥을 담당하고 있으며 지금은 자기 자신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니 참고 희생하는 것이다. ‘집에서 밥이나 하라’는 말이 주부들을 비하하는데 쓰이는 것에 비해, 뭇 남성들의 불만 중 상당수가 ‘집밥이 시원찮다’거나 ‘집밥에 성의가 없다’인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집에서 밥을 해 먹인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며, 그 일을 도맡은 육이가 제 역할을 잘 해내기에 전체의 가족 구성원들이 자기 역할을 할 수가 있다. 상전에는 順以巽也라 하였다. 순순히 따름으로써 겸손함을 드러내니 바른 것이고, 그래서 길하다.

 

九三 家人嗃嗃 悔厲 吉 婦子嘻嘻終吝

 

구삼은 양의 자리에 있는 양이니 강하다. 보아하니 집안에서 군기를 담당하는 사람 같다. 때론 너무 엄하게 굴어 집안 분위기를 망치고 본인도 내심 후회하는 것 같다. 요새 세상에 꼰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은 그것도 필요하다. 너무 느슨하여 제 할일도 다 하지 않았는데 뻔뻔하게 나오면 집안이든 바깥일이든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다. 상전에는 家人嗃嗃 未失也 婦子嬉嬉 失家節也라 하였다. 엄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어른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니 잃지 않은 것이고, 부녀자가 실없이 즐거워하는 것은 가정의 절도가 없어진 것이다. 嘻嘻는 즐거워하는 모양새지만 혼나면서도 즐거워한다면 눈치가 없는 것이던가, 혼내는 사람이 아주 우스워 보이는 것이다. 어른이 우스워보이면 그 어른 잘못이거나, 아랫사람이 버릇이 없는 것이다. 그 어느쪽이든 결과는 뻔하게 나쁘다.

 

六四 富家 大吉

 

주역에서 이렇게 간단한 말로 크게 길하다고 말한 효사는 많지 않다. 집이 부유해지고 크게 길하다니 모두의 꿈 아니던가. 상전에는 順在位也라 하였다. 자기 위치에서 순리대로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사의 위치가 어떻기에 그럴까? 육사는 음이 음 자리에 있다. 초구와 음양응도 된다. 위아래로 양효와 응한다. 벽돌 사이에 바른 시멘트가 접착제와 지지 역할을 하듯, 양효 사이의 음효는 두 양효가 충돌하지 않게 조율하고 화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아주 작은 조직이라도 이끌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중간 관리 실무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 육사는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중이며, 가정이 그야말로 제대로 굴러가도록 하는 주역이다. 괘사에서 말하는 ‘여자의 바름’을 직접적으로 수행하는 효가 육사이다. 그러니 집을 부유하게 하며 크게 길하다.

 

九五 王假有家 勿恤吉

 

상전에는 王假有家 交相愛也라 하였다. 서로 사랑하는 대상은 아마 자기 짝인 육이일 것이다. 육이가 집에서 가족들의 먹을 것을 책임지고 있으니 구오는 마음놓고 일을 할 수가 있다. 집을 지극히 한다는 말에는 ‘살림 그거 뭐가 힘들다고’, ‘그렇게 힘들면 당신이 나가서 돈 벌어 오던가’, ‘애 너만 키우냐’ 같은 말은 들어 있지 않다. 서로 각자 맡은 일을 존중함으로써 서로 사랑한다. 그래서 길하다.

 

上九 有孚 威如 終吉

 

상구는 음의 자리에 있는 양이다. 항상 상구는 한 발 물러나 조용히 있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자리이다. 그러나 위엄있게 한다고 하였다. 다만 조건이 있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은 하루 아침에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궤적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자기가 뱉은 말을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어야 위엄이 생기는 것이지, 자기는 아무렇게나 대충 살고 스스로 말한 것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이 위엄만 갖고자 하면 비웃음거리밖에 안된다. 한 집안의 어른으로서 그 품위와 위엄을 지키려거든 손아랫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짓을 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스스로의 위엄을 지켜야 마침내 길해질 수 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정치가 있다. 가정도 예외가 아니다.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도, 집안 사람들이 지킬 규칙을 정하는 과정도,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의 처리 과정도 있다. 가끔은 사회의 법을 끌어와 가정을 단도리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가족 구성원들이 정한 규칙에 의해 모든 것들이 결정된다. 가족회의를 통해 도출한 결과든 암묵적인 합의에 의한 것이든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야 생활이 이루어지며, 이것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때 불화가 생긴다. 각자가 생각하는 ‘남편다운 것’, ‘부인다운 것’, ‘엄마다운 것’, ‘아빠다운 것’, ‘자식다운 것’은 누구나 다 다르다. 여기에서 갈등이 생기고 결국은 파탄을 부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가 우리에게 가족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역할하는 법을 가르쳐준 적이 있었나 싶다. 우리 부모님 세대는 자식과 살 부비며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경제적으로 뒷받침을 해주고 공부를 시키는 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고 사회 전반적으로 그저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뿐이다. 누구도 우리에게 자식과 소통하는 법, 부모와 속을 터놓는 법, 부부 사이에 비난을 빼고 이야기하는 법 같은 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갑자기 물가에 버려진 어린애처럼 혼자 수영하는 법을 터득할때까지 물에 빠지고 코로 물을 마시며 그 역할을 해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각자 서툴게 부모가 되고 자식이 되고 남편과 아내가 되는 사이 어딘가에서 틈이 크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노인들은 외로워지고, 청년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아이 엄마는 맘충 소리를 들으며, 젠더 갈등은 불이 붙었다. 얼마 전 어떤 매체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대 여성에 비해 20대 남성은 집안의 소득 수준이 높을수록 자신의 것을 남과 나누지 않겠다는 성향을 강하게 드러냈다고 한다. 무턱대고 20대 남성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들의 윗세대가 가르친 ‘아들다움’이 대체 무엇이었는지를 반성해야 될 때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 기대어 노년을 보내야 하는 세대에겐 매우 큰 재앙이 될 것이다. 그 때에 과연 우리는 믿음을 두고 위엄과 품위를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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