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약초 기행] 4. 도라지와 더불어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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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 약초 기행] 4. 도라지와 더불어 사는 사람
  • 승인 2004.10.2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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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惠 善 (작가·연변작가협회 주임)

약초 답사 팀을 안내하는 농부차림의 50대 장년을 나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족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한족 티가 나지 않았다. 유창한 연변 조선말 방언을 썼고, 웃는 모습이나 예의를 차리는 모습 모두가 조선족이다.

그의 집을 보았지만 집 역시 조선족이다. 우선 지붕이 책을 엎어놓은 듯이 각이 난 한족 식이 아니고 동그스름하게 벼 이엉을 한 조선족 식이다. 집 구조를 보면 함경북도 식의 온돌이다. 정주와 방이 있고, 정주에 부엌이 딸려있고, 부엌 우에는 구들과 같은 수평선에 널 장판이 깔려있다. 그 옆방은 옛날에 우사(牛舍)나 방앗간으로 사용했을 것 같은 창고가 딸려있다.

우리는 늘 머릿속에 하나의 프로그램이 입력돼있다. 56개 민족이 살고 있는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보았을 때는 어느새 ‘우리 민족이냐 타민족이냐’ 라는 프로그램이 작동된다. 무의식은 클릭을 하거나 말거나 자기 프로그램대로 돌아간다. 의미가 없는 때가 대부분이지만 무의식이 하는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타인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는 소수민족의 생존본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만 단일하게 사는 고국에 가서도 이 프로그램이 작동해 혼자 실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굳이 한족이냐 조선족이냐 라는 프로그램이 작동된 이유를 따진다면, 도라지는 조선족만이 즐겨 먹는 나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인 의미에서 보면 도라지는 중국에서 조선족을 상징한다. 길림시에 우리 조선족의 문학지 《도라지》가 있는데, 이 잡지의 중국어이름을 길경(桔梗)이라 하지 않고 굳이 우리말의 음을 따서 《道拉吉》(또우라지)라고 쓴 것도 도라지의 깊은 문화의미를 살리기 위한 것일 것이다. 몇달전 길림 CCTV에서 《도라지와 조선족》이라는 제목으로 조선족을 소개하는 프로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프로에서 도라지에 관한 조선족의 전설, 민속, 민요, 전통 무용, 요리가 소개되었었다.

약초 답사팀 일행이 그의 집 뜰에 들어서자 환영식이나 하듯이 개 세 마리가 일제히 짖어댔다. 그 소리에 놀랐는지 게사니(거위) 두 마리, 이웃집에서 마실 온 닭 몇 마리도 동참하며 소리를 질렀다. 개들은 한 마리는 우사(牛舍)에, 한 마리는 대문 어귀에, 한 마리는 집 뒤뜰 배나무 옆에 각각 집을 가지고 있었다. 두 마리는 검은 판에 흰 얼룩이 예쁘게 간 얼룩개고, 한 마리는 풍산개 모양으로 털이 새하얀 아줌마 모습의 개였다.

워낙은 이 집 20마리 황소의 보초병들인데, 소들이 거의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별 볼일 없이 한가하기만 하단다. 아직도 산골인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평화로운 동네여서 소를 도적맞을 염려가 없다. 동네의 소 수백 마리도 다 산에서 혼자 풀을 뜯으며 자란다고 한다.

그의 집 뒤뜰 살구나무에서는 살구가 한창이다. 해마다 혼자 익고 혼자 떨어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한다. 일행은 빗물이 잎사귀에 고여 후둑후둑 떨어지는 살구나무아래에 서서 곱게 익은 살구를 따서 먹었다. 자기 손으로 따서인지 별맛이었다. 사닥다리에 올라서서 살구를 따서 손님들에게 주는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정유국(程維國), 올해 53세다. 아버지는 산동 태생으로 젊어서부터 북한 신의주에서 가서 해삼, 고등어 등 수산물 무역을 하다가 광복이 난 후 1947년도에 중국 연변으로 들어왔다. 정유국씨는 가정의 영향을 받은 데다가 조선족 위주의 동네에서 살다보니 점차 모습, 생활방식까지도 조선족이 돼간 것이다. 그는 조선족처럼 도라지나물을 양념에 무쳐 즐겨 먹는다고 한다.

소기골은 개혁개방 전에는 조선족 160호에 한족은 5호 뿐이었다. 지금은 조선족 60호, 한족 15호라고 한다. 개혁개방을 거쳐 조선족의 거주 판도가 변해가고 있다. 동북 3성에만 살고 있던 조선족인데 현재 20여만 명이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따라 연해주로 이주하고, 한국에 16만, 기타 미국, 일본 등 50여 개 나라에 수만 명이 유학 또는 돈벌러 나갔다. 그 물결에 실려 이 동네의 조선족도 100여 호가 이주한 셈이다.

정유국 씨는 일찍부터 산도라지를 캐서 팔곤 했다. 본격적으로 재배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산도라지가 많아 큰 규모를 이루지 못하고 작은 면적에 도라지재배를 하다가, 1992년에 한 헥타르 정도 심었다. 전부 염소 배설물로 된 농가비료를 쳐서 도라지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1995년부터는 여러 사정으로 2천 평방미터에 도라지를 재배했다. 올해에는 3천 평방미터에 도라지를 심었는데 후년 9월이면 수확한다고 한다. 그는 한국 동우당 제약회사에 도라지를 팔곤 했는데, 도라지가 깔끔하고 질이 좋은 것이 인연이 되어 동우당제약회사의 도라지재배 관리를 맡게 되었다.

올 4월말부터 동네의 조선족가정 10가구, 한족가정 5가구를 인솔해 5만 평방미터에 도라지 씨를 뿌렸다. 소기골의 땅은 질 좋은 사토질이어서 도라지재배에 아주 적합하고 한다. 도라지 씨를 뿌리는 쟁기를 보니 갈쿠리 모양으로 생겼다. 도라지가 싹이 돋고 풀이 올리 밀자 호미로 기음을 맸다. 닭, 소, 돼지의 변으로 된 비료는 겨울과 봄에 낸다고 한다. 지금은 도라지가 작아서 농가비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첫해에 관리를 엄하게 하면 이듬해부터는 도라지가 건실하여 쉽게 관리할 수 있습니다. 첫해에는 기음만 해도 4,5 차 정도 매줘야 합니다” 라고 했다.
그는 방풍, 황기, 시호, 더덕 등 약재들도 재배했었다고 한다. 그의 집 뜰 안에는 백양나무 묘목과 도라지가 가득 자라고 있다. 해마다 백양묘목을 팔아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 1995년도에는 염소 수백 마리를 사양해 미국적 한국인을 통해 북한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의 집 문 앞에는 포도넝쿨을 닮은 식물이 뒤덮여있다. 꽃은 잎사귀보다 연한 연두빛, 이파리가 열댓 겹으로 감싸안고 올리 피었는데, 모양은 엄지손가락 두 개를 마주 붙인 것만큼 통통하고 기름하다. 아버지가 30년 전에 수 천리 밖의 공주령에서 옮겨온 맥주꽃인데, 맥주공장에서는 이 꽃을 넣어 맥주 맛을 낸다고 한다. 맥주꽃이 식도건강에 좋다고 그의 집 식구들은 매일 차처럼 마신다고 한다.

“명년에 새집에 놀러 옵소예! 땅 만 2천 평방메다를 사 놓구, 새집 지을 단도리두 다 했습꾸마” 라고 연변사투리를 하며 환하게 웃는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 그의 얼굴에서 9월에 산을 물들일 보라빛 도라지꽃을 본다. <계속>

협찬 : 옴니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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