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오름에서 삶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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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박히준의 도서비평] 오름에서 삶을 만나다
  • 승인 2021.05.2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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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히준

박히준

mjmedi@mjmedi.com


도서비평┃제주, 오름, 기행

중간고사 채점을 마치고 잠시 짬을 내어 다시 제주 올레길에 들었다. 시간과 정황이 맞는 아주 드문 기회에 두세 코스 정도만 걷다 보니 완주하려면 아직도 몇 년은 족히 더 걸리겠다. 사실 걸을 길이 남아 있다는 설렘이 좋아 일부러 마치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걷기는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는 법을 가르쳐준다. 버스나 차로는 금방 도착하는 곳이지만 올레길을 따라 걸으려면 서너시간 정도는 넉넉히 잡아야 한다. 올레길은 제주를 한 바퀴 도는 둘레길이기도 하지만, 직선을 따라 빨리 완주하려는 사람의 발걸음을, 바당(바다)을 따라, 때로는 마을 안길로, 밭길로, 중산간 숲길로도 인도한다. 어디 그 뿐이랴. 올레길은 또한 오름을 품고 있는데, 걷다가 우연히 오른 오름에서 만나는 바당, 한라산, 다른 오름들, 그리고 조각보 같은 밭들의 풍광은 그야말로 올레꾼의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하다.

손민호 지음, 북하우스 출간

 

올레길을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제주와 관련된 책들을 한두 권 모으기 시작한 것이 열권을 넘어섰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책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시작은 제주의 바다와 오름의 아름다움을 예찬하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국 사람과 삶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행기자인 손민호 작가의 “제주, 오름, 기행”은 여운이 길게 남는 책이다. 우선 책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쉼표를 빼고 읽으면 “제주에 있는 오름을 다녀온 기행문”이란 뜻이 되지만, 각 단어 사이사이에 쉼표를 두어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숨고르기 하며 읽게 하였다. 즉, 이 책은 단순한 기행문이라기보다, 오름을 주인공으로 하여 저자와 우리네 삶에 대한 생각을 담아 낸 수필에 가까운 기행문이다.

제주에는 한라산 외에도 368개의 작은 오름들이 있다. 저자는 오름 가운데 가 볼 만한 40개의 오름을 추려 내어, 이들을 다시 “나다 (화산 그리고 오름)”, “살다 (사람 그리고 오름)”, “들다 (숲 그리고 오름)”, “걷다 (올레 그리고 오름)”, “울다 (김영갑 그리고 오름)”의 주제로 나누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 다섯 주제를 보고 있자니 오름과 사람의 삶이 마치 오버랩이 되는 것만 같다.

“오름은 한라산처럼 거대한 세상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비록 누추하나 나만의 세상 하나씩은 우리도 만들면서 산다. 하여 우리의 오름 여행은 정겹고 또 눈물겹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는 김영갑1) 사진작가의 오름 사진을 바라보다 비로서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란 걸 알았다고 했다. 세상에는 크고 높은 산만 있는게 아니라 작고 낮은 산도 있다는 걸, 압도하는 한라산이 되지 못하고 엎드린 오름으로 사는 인생이 더 많다는 걸 깨달았단다. 김영갑 작가의 용눈이 오름 사진을 보며, “여기 곡선의 세상이 있다. 곡선으로만 이루어진 하나의 세상이 있다. 이 세상의 곡선은 변덕이 심하다. 올라가다 내려오고 내려가다 다시 올라온다. 끊어지는 줄 알았더니 이어지고 이어졌다 싶었더니 엉켜 있다. 한번도 멈춰 서거나 일어선 적은 없다. 하여 직선의 긴장감은 여기에 없다. 날카로이 금을 그어야 하므로 직선은 늘 초조하다. 그러나 여기의 곡선은 늘 느긋하다. 안단테, 안단테, 안단테...속도가 줄어들고 소리가 잦아든다. 다만 박자는 놓치지 않는다. 곡선이 그리는 굴곡에는 장단이 매겨져 있다. ...용눈이 오름은 세상의 모든 곡선을 다 거느린 오름이다.”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글에서 용눈이오름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있는 듯 그려질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도 느껴져 정겹고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 책은 제주의 오름을 얘기하고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질곡 있는 삶을 묵묵히 견뎌온 우리네 찐한 삶의 이야기로 향한다. 사실 오름에 오르면 오름이 보이지 않는다. 오름의 모습을 잘 보려면, 오름에서 내려와 멀리서 바라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도 잠시 벗어나서 바라봐야 비로소 삶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오름은 기꺼이 우리에게 그런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각주 1) 김영갑 선생은 제주 중산간 지역 오름의 아름다운 사진을 남긴 사진작가로, 올레3길을 걷다 만나는 ‘김영갑갤러리 두모악(http://www.dumoak.co.kr/)’에서 그의 사진을 만날 수 있다.

 

박히준 / 경희대 침구경락융합연구센터 소장, 경희대 한의대 교수, 장-뇌축기반 맞춤형 침치료기전연구실 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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