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庵과 관련된 三木榮 저서의 오류에 대한 小考
상태바
惠庵과 관련된 三木榮 저서의 오류에 대한 小考
  • 승인 2021.04.17 05: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기춘·서정철·최순화

한기춘·서정철·최순화

mjmedi@mjmedi.com


임상 한의사 3인이 연구한 황도순-황도현 80

지금까지 필자는 惠庵에 대해 연구하면서 경성대 교수이자 의사이며 의사학자인 三木榮의 기존 연구들을 많이 참조하였다. 그런데 三木榮의 저서 중 惠庵과 관련된 연구들에서 오류가 적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본지 기고에서 여러 주제별로 나누어 三木榮 저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 왔다. 그런데 三木榮이 저술한 책들의 오류를 기고한 내용이 여기저기 주제별로 흩어져 있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이 있었다.

이번 호에서는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三木榮 저서에 보이는 惠庵과 관련된 오류를 전반적으로 정리해 한 편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1. <本草附方便覽>과 <東醫寶鑑>의 관계에 대한 오류

三木榮은 “이 책은 여러 질환을 대체로 <東醫寶鑑>의 목차 순서로 열거하고, 각 질환 아래에 <東醫寶鑑>의 처방을 뽑아서 적고, 그 처방의 「註」에 의거하여 蔡烈先(號는 繭齋)의 <本草鍼線>을 인용하여 본초 개념을 알 수 있도록 편찬한 것으로, 즉 서명은 제시한 바와 같이 <本草附方便覽>이다(本書は諸疾患を大體東医宝鑑の目次の順に列擧し各疾患の下に宝鑑の處方を抄錄しおり、其の處方の「註」に據って蔡列先(號は繭齋)の本草鍼線を引いて本草の槪念を知り得る樣に編纂せられたもので, 卽ち書名の示す如く本草附方便覽である)”라고 하였다(<朝鮮醫籍考>1),

또한 “이 책은 여러 질환을 대략 <東醫寶鑑>의 목차 순서로 열거하고, 각 질환 아래에 <東醫寶鑑>의 처방을 뽑아서 적고, 그 처방의 「註」에 의거하여 <本草鍼線>을 인용하여 본초 지식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편찬한 것으로, 즉 서명은 제시한 바와 같이 <本草附方便覽>이다(本書は諸疾患をおよそ『東医宝鑑』の目次順に列擧し、各疾患の下に『宝鑑』の治方を抄錄しており、そしてその處方の「註」に據って、『本草鍼線』を引いて本草の知識をも充分知り得るように編纂したもの、すなわち書名の示すごとく本草附方便覽である, <朝鮮醫書誌>2))”라고 하여 거의 동일하게 解題를 하였다.

그리고 “이 책은 <東醫寶鑑>을 근본으로 삼고 각종 질환에 대한 치료법(처방) 가운데 유용한 것을 뽑아서 적고, 그 처방의 본초 지식은 청나라 蔡列先의 <本草鍼線>을 인용하여 알 수 있게 편찬한 것으로, 의학과 본초학을 합하여 질병을 치료할 때 쉽게 그 처방의 본원을 잘 이해하도록 하여, 초학자도 이 책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도록 잘 되어 있다.(この書は「東医宝鑑」を本とし各種の疾患に於ける治療法(處方)で有用のものを抄錄し、そしてその處方の本草的知識は淸の蔡列先の「本草鍼線」を以て引用し得るように編纂されており、すなわち医學と本草學とを合わせ, 疾病治療に際し容易にその處方の本源をよく理解し、初學者にてもこの一書があれば充分事足りるようになされているのでおる, <朝鮮醫學史及疾病史>3))”라고도 하였다.

三木榮은 <本草附方便覽>에 대해 각 질환 아래에 “<東醫寶鑑>의 치료 처방”을 뽑아서 적은 것이라 하였는데, “<本草綱目>의 附方”을 뽑아서 적은 것이라 해야 옳다. 다음으로 <本草附方便覽>과 <本草萬方鍼線>의 관계에 대해 三木榮의 “그 처방의 「註」에 의거하여 <本草鍼線>을 인용하여 본초 지식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라 하였는데 “각 附方의 註에 <本草鍼線>의 기술 방식을 인용하여 <本草綱目>의 어느 부분에 해당 附方이 있는지 알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이렇게 <東醫寶鑑>과 <本草附方便覽>, <本草萬方鍼線>의 관계를 맨 처음 잘못 이해한 사람은 三木榮이다. 三木榮은 <朝鮮醫籍考>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도 <朝鮮醫書誌>와 비슷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三木榮이 이와 같이 解題를 잘못한 이유를 생각해 보면 <本草附方便覽> 書名의 本草를 <本草綱目>을 간략하게 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方劑와 대비되는 개념인 本草로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2. 惠庵의 약방 명칭과 위치에 대한 오류

三木榮은 <朝鮮醫籍考>, <朝鮮醫書誌>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각각 “京城武橋にて開業”, “京城武橋にて門戶を張る”, “京城武橋で医業を開き”라고 하여 京城의 武橋를 개업 장소로 지목하였다. <對譯脈證·方藥合編>의 黃度淵 小傳에는 “황도연선생이···…무교동에서···…藥局을 운영하여”라고 하여 황도연이 무교동에서 개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三木榮은 <醫宗損益> 標題에 武橋贊化堂藏板이라는 글자를 통해 惠庵의 약방이 贊化堂이고, 그 약방은 武橋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논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의 개업은 오늘날과 달리 집에서 약방을 같이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고, 武橋와 石井洞이 매우 가까운 거리이므로 惠庵의 약방은 武橋가 아니라 거주지인 石井洞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黃泌秀에 대한 오류

三木榮은 맨 처음 黃泌秀가 儒醫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朝鮮醫書誌>에 “子泌秀また儒医として名があつた”라고 되어 있다. 이후 발간된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도 “黃泌秀, 度淵の子, 愼村と号した. 儒医として名高く……”라고 되어 있다(표 1).

三木榮은 <朝鮮醫書誌>와 <朝鮮醫籍考>에서는 <方藥合編>에 대해 각각 “黃度淵撰 黃泌秀編”과 “黃度淵著 黃泌秀編”이라고 기술한 것과 달리 이후 <朝鮮醫學史及疾病史>의 <方藥合編> 圖式에서는 “黃泌秀撰”이라고 기술하였다.

黃泌秀에 대하여 <朝鮮圖書解題>4)에는 “黃泌秀號は 惠菴, 昌原の人 都正 道淳の子なり……”라고 하였는데 惠庵은 黃度淵의 號이고, 慎村子가 黃泌秀의 號이다. 三木榮은 그의 초기 저서인 <朝鮮醫籍考>에서 黃泌秀에 대해 “其の子泌秀(愼村)も世に著はれた”라고 하여 儒醫라는 언급이 없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이후 저서인 <朝鮮醫書誌>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는 黃泌秀를 儒醫라고 하였다. 추정컨대 조선 후기 제일의 醫人인 黃度淵의 아들로 遺志를 받들어 <方藥合編>을 編“述”했다고 하다 보니, 醫人의 한 사람으로서 儒醫가 아니고서는 어려웠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黃度淵의 아들인 黃泌秀에 대해 잘못 기술된 부분들이 있는데 가장 심각한 오류는 黃泌秀를 儒醫라고 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編과 輯은 순우리말로 엮은 것을 말하고, 著, 述, 撰은 지은 것을 뜻한다. 編述은 編하여 述한 것으로 결국 述과 같이 지은 것에 해당한다. 이렇게 엮은 것과 지은 것은 엄연히 다른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혼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方藥合編>이다. <方藥合編>은 惠庵이 지은 遺稿를 黃泌秀가 간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黃泌秀가 지은 것처럼 編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이다. 대다수의 <方藥合編> 관련 서적이나 기록에서 黃泌秀를 <方藥合編>의 編“撰”者로 적고 있다. 그러나 黃泌秀는 ‘方藥合編源因’에서 “公年已七十有七不可以自抄命子傳書……”라 하여, 惠庵이 77세의 高齡으로 스스로 抄할 수 없어서 아들인 자신에게 책을 건네주어 刻印하도록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황필수는 단지 家督으로서 遺志를 실행한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方藥合編源因> 외 어디에도 黃泌秀가 成冊에 관여했다는 기록이나 그와 유사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4. 玄公廉에 대한 오류

三木榮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처음으로 玄公廉이 惠庵의 제자라고 하였는데, “玄公廉, 字は渼隱, 酉齋と號す, 度淵の弟子, 高宗古終古鐘姑に<方藥合編>を增訂した.(<增訂方藥合編>)”라고 되어 있다. 三木榮이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언급한 <增訂方藥合編>5)은 大正 15(1926년)에 大山書林과 大昌書院이 공동으로 發行及發賣所로 되어 있는 책인데, 이 책은 標題에 玄公廉 編輯이라 되어 있고, 판권지에는 著作兼發行者를 玄公廉이라 하였다. 따라서 玄公廉이 惠庵의 제자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책은 <增訂方藥合編>인 것으로 보인다.

三木榮은 <朝鮮醫學史及疾病史>에서 渼隱은 玄公廉의 字이고 酉齋는 그의 號라고 밝혔지만, 명확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證脈方藥合編>은 <方藥合編 全載醫方活套>나 <重訂方藥合編>과 달리 새로 “新增證脈方藥合編 酉齋”가 增補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三木榮은 “增訂”方藥合編과 “新增”證脈方藥合編을 혼동한 것으로 보이고, <增訂方藥合編> 標題에 玄公廉 編輯이라고 나오므로 玄公廉이 惠庵의 제자라는 잘못된 논술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즉, 三木榮의 <朝鮮醫學史及疾病史> 원고는 1948년에 완성되었으나, 초판 간행은 1955년에서야 이루어졌는데, 三木榮은 1926년의 <增訂方藥合編>을 보고서 <證脈方藥合編>의 “新增”이란 용어를 玄公廉의 “編輯”이란 용어와 동일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三木榮은 “高宗廿四年丁亥に<方藥合編>を增訂した”이라 하여 고종 24년 丁亥에 <方藥合編>을 增訂하였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丁亥는 <證脈方藥合編> 新增證脈方藥合編 酉齋 “方藥書…….丁亥玄月受業渼隱生謹識”의 丁亥를 말하는 것으로 三木榮은 <證脈方藥合編>을 참고하여 <朝鮮醫學史及疾病史>를 저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1. 三木榮, 朝鮮醫籍考, 自家出版, 1935:57-59.

2. 三木榮, 朝鮮醫書誌, 學術院圖書刊行會, 1956:149-152.

3. 三木榮, 朝鮮醫學史及疾病史, 大阪, 自家出版(再版), 1963:257, 282, 348.

4. 朝鮮總督府, 朝鮮圖書解題, 朝鮮通信社, 1932: p.349.

5. 玄公廉 編輯, 增訂方藥合編, 大山書林, 大昌書院, 大正 15(1926).


한기춘·서정철·최순화(mc맥한의원·우리경희한의원·보광한의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