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재 임상8체질]海初 崔承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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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임상8체질]海初 崔承達
  • 승인 2020.12.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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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재

이강재

mjmedi@mjmedi.com


8체질의학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_29

 

 

지난 9월에, 경희한의대 본과 3학년 학생들이 졸업작품으로 ‘20가지의 임상 분야를 정해서 해당하는 학회나 임상가에 대한 자료조사를 하고 또 인터뷰를 진행한다면서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후배이고 특히나 학생을 돕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므로 기꺼이 승낙하였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시작을 하기도 전에 몹시 답답해졌다. 내가 공부하는 8체질의학 부분을 담당한 학생들이 조사한 내용과, 추가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질문지를 보고 그렇게 된 것이다.

내가 본과 3학년이던 때가 1986년이니까 이 학생들은 나와 34년의 격차가 있다. 학생들이 8체질의학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물과 질문지는 아주 중구난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현재 그들의 처지가 그렇기 때문이다. 8체질론과 8체질의학은 한의대 정규과정에는 들어 있지도 않다. 그러니 내가 그들과 8체질의학을 주제로 대화를 한다면, 이것은 마치 이세돌과 바둑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1) 같은 것이다.

 

(1) 誠泉 宋一炳

1959년에 송일병은 동양의약대학(東洋醫藥大學) 한의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본디 고교시절에는 의대 진학을 생각했었는데, 교육계에 있던 부친이 한의대를 나와서 교수가 되어보라고 권고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 2학년이던 어느날 우연히2) 사상의학을 하던 최승달(崔承達) 선생을 만나게 된다. 1960년에 최승달 선생은 73세였다. 한의학과 2학년인 송일병과 최승달 선생의 나이 차이는 50년이 넘는 것이다.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명선록(明善錄)을 번역한 김달래(金達來), “필자의 은사인 송일병 교수님께서도 한의대 학생시절에 최승달 노인의 집에서 우연히 이 책을 접하고 직접 대학노트에 만년필로 원문만 필사해 놓으셨고이렇게 적었다.3) 그 노인은 송일병에게 명선록을 베끼라고 했다. 단순한 작업은 지겨운 일이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 필사를 하던 동급생이 있었다.4) 이풍용(李豊鎔)5)이 밝힌 날짜가 정확하다면 1960년에 최승달 선생을 만나, 한의대를 졸업할 시기가 된 196212266)명선록을 베끼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원광대 한의대에 재직7)했던 정우열(鄭愚悅)은 송일병과 동양의대 동기이다. 정우열이 쓴 한의학 100년 약사에 동양의대에 다니던 시절의 교과과목을 정리한 표가 있다. 사상의학(四象醫學) 과목은 없다.8) 송일병이 본격적으로 사상의학 공부에 빠져든 것은 공의(公醫)를 마치고 온 1965년 이후일 것이다. 홍순용(洪淳用) 선생이 이사장이던 대한한의학회와 서울시한의사회가 주최한 사상의학학술강좌가 11월과 12월에 연달아 개최되었고, 허탁(許鐸), 홍순용, 한동석(韓東錫)9) 등이 진행한 강의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송일병은 1963년에 졸업한 후에 서울대에서 6개월간, 무의촌 근무를 위한 한지의사(限地醫師) 교육을 받은 후에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 보건지소장으로 파견돼 2년간 근무했다. 공의로 가게 된 것은 해당되는 명단에서 노정우(盧正祐) 선생과 이름을 바꾼 결과였다. 그 인연으로 공의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 노정우 선생 밑에서 체질의학(體質醫學) 전공으로 석사 학위10)를 했다.

의약계에서 도제식(徒弟式) 교육이라고 한다면 스승의 진료실에서 조수로 일한다던지, 선생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약방에서 약재관리를 맡는다던지 하면서 기술을 배우는 형태를 뜻할 것이다. 물론 스승에 대한 절대복종이라는 바탕이 있다. 일본의 예를 보면, 고전파(古典派)의 일원인 혼마 쇼하쿠(本間祥白 1904~1962)는 스승인 이노우에 케이리(井上惠理 1903~1967)의 문하에서 4년간 수업한 후에 19439월에 독립했다.

최영성은 201010월에 동방학19집에 실은 한국철학 연구사에서 본 玄庵 李乙浩의 위상11)에서, 이을호가 사상의학의 대가인 해초 최승달을 만나 그의 문하에 입문, ~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고 썼다. 20066월에 송일병을 인터뷰한 기사를 쓴 민족의학신문의 강은희 기자도 그는 최 선생 밑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고라고 썼다. 최승달 선생에게 배웠던 이을호는 경성약전 학생이었고, 송일병은 동양의대에 다니고 있었다. 과연 누가 도제식 교육을 받았다고 밝혔던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2) 玄菴 李乙浩

이을호는 19101015일에 전남 영광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1918년에 영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5년 과정을 수료하고, 1923년에 영광학원 중등과에 입학하였는데 2년 후에 학교가 폐교되었다. 상경하여 1925년에 중앙고등보통학교 2년에 편입했고 1927년에 졸업(20)했다.

중앙고보 졸업반이던 1926년에 폐결핵을 앓았는데, 서양식 병원을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으나 낫지를 않고 있던 때에 수동약방(壽東藥房)의 최승달 선생을 만나게 된다. 최승달 선생은 사상의학을 쓰고 있었다. 이을호는 고보 졸업 후에 1년여를 금강산에서 요양을 하면서 사상의학적인 자가치료를 했다고 한다.12)

최승달 선생은 진로를 고민하는 이을호에게 동양의학에 대한 약학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면서 경성약전(京城藥專)에 들어갈 것은 권유하였다. 1930년에 경성약전에 입학한 이을호는 재학 중에 일본 한방의학 서적과 한방과 한약등의 잡지를 탐독하였다. 그러면서 한국 학생을 중심으로 사상한의학 독서회를 조직하여 최승달 선생을 초빙하여 강의를 들었다.

이을호는 “1931년에 동의수세보원을 만난 이후에는 자나 깨나 어느 곳에서나 수세보원 아닌 것이 없었다. 내 생애와 더불어 존재하는 양 귀중하게 간직했다. 마치 논어나 바이블을 신주처럼 모시는 심경과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경성약전을 졸업한 후 1933년에 이을호는 고향인 영광에 호연당약국(浩然堂藥局)을 개업했다. 그러다가 1937년에 목포형무소에 투옥된 이후에 경학(經學)과 다산학(茶山學)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옥중에서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을호와 관련한 자료에서 보면, 스승인 최승달을 함경도 출신이고 동무 이제마의 제자라고 언급하고 있는 곳이 많다. 이을호는 1936529일에 조선일보에 쓴 글에서 지금부터 4년 전에 필자에게 사상의학을 가르쳐주신 최승돈(崔承敦) 선생이라고 쓰기도 했고, 하버드-옌칭 연구소(Harvard-Yenching Institute)에서 돌아온 정근식(鄭根埴)199411월에 광주 월산동 다산학연구원에서 만났을 때도, 자신을 치료해 준 사람이 최승돈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3)

 

(3) 海渟 崔奎植

최규식(1930~ )은 최승달 선생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아래의 내용은 그가 20101월에 펴낸 회고록에서 찾은 것을 중심으로 쓴 것이다. 최승달 선생은 1888624일에 황해도 옹진군 북면 화산동리에서 태어났다. 초혼(初婚)에서 1114)를 두었고, 상처(喪妻)한 후에 이형달(李亨達)과 재혼하여 4115)를 더 얻었다. 선생은 과묵했고 고요하고 근엄했다.

젊은 시절에는 기독교사상과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두었다. 1907년 가을에 개교하여 1929313일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던, 감리교 계통의 평양 협성신학교에 다녔다. 그는 성경(聖經)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살았다. 1921년에 동지들과 일본주재 미국대사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다가 체포되어, 1921128일에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40세 전후에 서울에 와서 한약종상(漢藥種商) 자격을 따고 광화문통(光化門通) 193번지에 수동약방을 냈다. 고약(膏藥)이 인기가 있었다.

수동약방에는 친한 논객들이 수시로 모여 시국을 논했다. 박희숙(朴熙淑)16) 일야(一野) 정운영(鄭雲永) 등이었다. 아울러 경성약전에 다니던 이을호가 조직한 사상한의학 독서회에 나가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해방 후에 광화문에서 내수동 198번지로 수동약방을 이전하였는데, 이 집은 적산가옥으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의 유택(遊宅)이기도 했다.

장남인 최준식은 옹진에 있다가 해방 후에 월남하여, 수동약방 일을 도우면서 최승달 선생을 모시고 살았다. 선생은 1967511일에 작고하였다. 독립운동 공훈으로 정부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2006년에 선생의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 문헌

1) 정우열, 한의학 100년 약사」 『대한의사학회지821999. 12.

2) 송일병 교수 [한의학은 나의 삶 49· /] 민족의학신문2006. 6. 16/23.

3) 최규식, 仁寺洞 40年 海渟 崔奎植 回顧錄도서출판 큐라인 2010. 1.

4) [냉증과 열증] 체질박사(김달래) 블로그 2012. 3. 19.

5) 다산학연구원, 현암 이을호 전서 19/25/26/27한국학술정보 2015. 6.

6) 다산학 정립, 사상의학 재건 실천하는 선비신동아2015. 8.

 

각주

1) 이것은 순전히 비유이다. 나를 스스로 이세돌의 수준으로 높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2) “우연이라는 인연의 끈으로 사상의학과 만나” 

3) [냉증과 열증] 체질박사(김달래) 블로그 2012. 3. 19. 

4) 李豊鎔, 제3의 의학 [醫窓閑話] 『漢醫師協報』 1983. 3. 15.
   “1962년 12월 26일, 광화문 故 최승달 선생님 댁에서 송일병 형과(현 경희대한의대 재직) 필자는 가전 명선록 등사본을 필사하고 있었다.”  

5)  송일병과 동양의대 동기이다. 경희한의대 졸업기수로는 12기이다. 

6) 한의사협보가 발행된 날짜(1983. 3. 15.)로 보면 20년이 경과된 일인데, 이풍용이 년도와 일자를 적시하고 있으므로 그가 이 날짜를 특별히 기억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글이 진행되면서 이진윤(李鎭胤) 선생과 〈東武自註〉를 설명한 내용으로 보면 기억이 중첩된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이 든다. 이진윤 선생은 1961년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7)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병리학교실

8) 다만 내경(內經) 과목을 담당했던 한동석(韓東錫)이 동의수세보원에 관심을 가지긴 했다.

9)  한동석의 강의를 듣던 날, 송일병은 이진윤 선생에게 받았던 〈東武自註〉를 한동석에게 전달했다. 

10)  송일병, 「四象醫學의 藥理的 考察」 경희대학교 대학원 1967.

11)  2011년 2월 6일

12)  이을호의 후배이며 평생지기로 낙원동에서 하숙생활을 함께 했던 철학자 정종(鄭瑽)의 증언이다. 

13)  정근식, 「일제하 동서의학 논쟁과 이을호」 『현암 이을호 연구』 한국학술정보 2015. 6.

14) 장녀 忠誠, 장남 晙植

15)  琮植, 明植, 鳳植, 奎植, 一誠

16) 기미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朴熙道의 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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